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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Sep 16. 2024

시간의 닻을 내리다

8월 31일의 기록

 주말, 핸드폰을 12시간 사용한다. 오늘로 군대가 500일 남았다고 하길래 날짜를 세는 방법 따위를 연구했다. 오늘이 입대 48일째니까 입대 48일 전에는 뭘 했는지 구글 지도로 찾아보기도 하고, 1년 6개월 전의 오늘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입대 48일 전에는 고등학교때 만났던 첫 여자친구가 울면서 전화했다. 지금 신사역에서 술을 많이 마셔서 집을 못 가겠는데 혹시 와줄 수 있느냐고.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던데다가 왜인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저 입에 발린 말을 계속 하며 술을 마셨다. 이러려고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참았다. 하지만 남자친구 흉을 보면서 나에게 '진짜 좋아하는 건 너야'라고 말하며 울먹이는 모습에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즉시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딸을 인계해버리고는 술집을 나왔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이 활보하는 거리를 보니 이 세상은 내게 너무 난해했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니 여기서는 그런 세상을 떠나있으니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우주에 지구 말고도 사람이 사는 99개의 행성이 더 있는데, 그런 사실을 알기만 하고 그 행성들에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지 생각해봤다. 특히 지구가 그 중에 가장 살기 안 좋다면 더더욱 불행할 것이다. 그래서 바깥 세상을 들여다보는 건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했으며, 날짜를 거꾸로 세는 것도 그만뒀다. 다만 1년 6개월 전의 오늘을 추억하는 것은 계속했는데 아마 너와의 추억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나는 제자리에 멈춰있는데 너의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을 느껴서 괴로웠다. 나를 두고 먼저 가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할 계기도, 용기도 없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잊고 싶었다. 내일은 숨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그 불완전함을 밀어낼 수 있도록 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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