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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Sep 15. 2024

이상기후

9월 10일의 기록

 구름 한 점 없이 햇빛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보통 내 생일을 기점으로 날씨가 시원해지곤 했다. 물론 해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런 것이 신기하다. 아무래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속도는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때의 속도 그대로인가보다. 그렇지만 올해는 뭔가 이상했다. 오늘은 분명 내 생일 다음날이었는데도 낮에는 여름만큼 더웠다. 여름의 풀냄새와 뭉게구름은 온데간데 없고 햇빛만이 여름의 그것이었다. 지구가 고장난게 틀림없었다. 아침점호 집합시간에는 그래도 햇빛이 식당 붉은 지붕을 간신히 넘어와서 괜찮았는데 10시에 학과출장 집합을 할때는 샤워하듯이 모자 바로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지구와 함께 동기들도 고장난 것인지 집합시간이 5분이나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슬슬 상체가 젖어오고, 늦게나온 애들한테 짜증을 냈다. '화를 내봤자 사람은 변하지 않고 기분만 나쁘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다.' 이게 내 평소 철학이었지만 오늘은 나도 고장난 게 틀림없었다. 여러모로 고장난 하루였다.

 일본어를 익히는 것도, 일기를 쓰는 것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오직 책만 읽고 있다. 일본어야 지금은 실력이 늘지 않는 것 같아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간 늘겠지만 진짜 문제는 글쓰기다. 단어라는 점이 모여 문장이라는 선을 이루고, 문장이라는 선은 종이 면을 채우고, 종이 면들이 모여 입체적인 노트가 된다. 단어라는 0차원에서부터의 결여가 맹탕같은 노트라는 결과가 된다. 일기는 인생을 본뜬 것인데 일기가 지루하고 조잡한 것은 내 인생 탓인 것도 같다. 머신건으로 쏴봤자 빈 칸으로 가득한 인생은 총알을 저지하지도 않겠지.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문체와 경험으로 그 빈칸이 채워지고 있다. 이 일기장조차 창작이 아닌 도작인 것이다. 평년이라면 절대 안 했을 고민을 평년이었다면 절대 안 왔을 장소에서 하다보니 이게 현실이 맞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대신 채택할 현실도 없어서 그저 내 앞의 것을 해치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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