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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혁 Oct 23. 2022

모른다는 것을 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NOSCE TE IPSUM (너 자신을 알라)



 난 세상에 대해 도무지 알고 있는 게 없다. 나는 무지하다! 종이신문을 펼쳐봐도, 대학교재를 펼쳐봐도 나의 무지에 대한 확신에 힘을 보태주기만 할 뿐이다. 원숭이와도 원대한 승부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절망적인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나는 오랜 시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독서와 공부에 매진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더욱 다채롭고 풍부한 방식을 통해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얼핏 들어보았을 때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이나, 나는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그동안의 그 어떤 것보다도 훌륭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확신해 마지않는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어째서 훌륭한 깨우침인가? 이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기에 앞서, 이 말뜻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즉 무지의 지(知)는 두 가지에 관한 깨달음이다. 하나는 자신의 인식 경계 바깥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물질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그것을 배울 수도 없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 사람들이 지구 밖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과 같다. 지구 밖의 행성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망원경, 인공위성과 같은 도구의 부재로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지구, 혹은 그보다 훨씬 작은 자신의 영역이 곧 세상의 전부라 믿으며 살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곧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 의심하지 않는다. 지식을 점검하는 것은 몹시 성가시고 피곤한 일인데다, 만약 그 지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는 것이라면 검증해볼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전에 사람들은 생물이 무(無)에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믿었고,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을 믿었으며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돌고 있다고 믿었다. 과거에 비해 기술과 사회가 놀랍도록 발전한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 대상만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째서 좋은가? 그 이유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지식의 불확실성을 인지하여 자연스럽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직접 검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친구에게 자신은 덧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곱셈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무지에 대한 진솔한 고백 행위나, ‘사흘’이 ‘사일’과 어감이 비슷하니 사흘 뒤에 지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3일이 아닌 4일 뒤에 친구를 보러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을 배워 지식의 경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여 공부할 분야를 정해야 한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오답노트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오답노트를 통해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파악하게 되면, 지식의 공백을 효과적으로 메울 수 있게 되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배울 수도 없다. 과녁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10점을 맞히기 위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다트를 던져 주식투자를 하는 원숭이조차 삼갈 최악의 악수를 두는 것이다. 무지의 지는 배움의 길을 밝혀주는 빛이다.

 셋째, 창조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다. 이것은 자신의 지식을 넘어 인류 전체의 지식의 경계를 넓히는 데 도전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가 없다고 말했지만, 보리 국어사전이나 브리태니커에는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물론 농담이다). 폐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혁신과 창조를 일으킬 수 없다. 혁신적인 사고는 기발하며, 때로는 반항적이고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을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치부하지 않고, 그러한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해보며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열정적으로 논의함을 통해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라부아지에는 연소 반응을 설명하는데 플로지스톤설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도발적인 아이디어들의 결과물들이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무지의 지를 깨우치는 것이 하등 모욕적이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고를 훈련하고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며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 됨으로써, 결국 개인의 등불이 되고 등불이 모여 사회의 등대가 되어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밝혀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에 기대어 안식을 얻을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수많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서 불신과 맹신 사이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기꺼이 택하여, 비판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사고라는 등불을 이용해 끊임없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막다른 길목에 다다라 다시금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면서도, 결국에는 올바른 길을 찾아내고 끝없는 여정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여정이 언제 끝을 맺을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끝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정의 어떠한 순간에 새로운 가치와 행복을 발견해내고, 그 발견으로 사회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만남이라는 결과가 아닌, 기다림이라는 길고도 험난한 과정에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찾아내고는 하는 것이다.








1) Wally Gobetz, "NYC - Metropolitan Museum of Art - Death of Socrates", https://www.flickr.com/photos/wallyg/1659482830(검색일: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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