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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한 생각, 생각에 관한 배움

학부생으로서의 지난 몇 년 간을 회상하며

by 최승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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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과거의 끝맺음을 필요로 한다. 과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타인의 과거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이야기꾼들은 실패와 성공, 역경과 극복, 퇴보와 진보 등 다양한 단어를 이용해 특정인의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즐기는데, 어떤 대범한 이는 자신의 평가가 수리 모형의 절대적인 공리라는듯이 자랑스럽게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의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가치는 오직 오늘과 내일의 그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 높고 낮은 역경의 파도를 타게 된다. 특정한 경험을 인생의 결점으로 남겨 둘 것인지, 혹은 미래의 자원으로 삼을 지는 오직 순수히 삶의 주인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바둑알을 손끝으로 느끼며 차분히 복기하듯이, 삶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몇 년 간의 삶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1. 생물학 (2021.09 ~2022)


이 분야가 자신의 적성에 맞을까? 이것은 갓 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이다. 답은 정말 간단한데, 직접 해보는 수 밖에 없다. 현실이 상상과 다르다는 것이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자연과학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위대한 자연의 운동 원리, 전자의 분포, 생명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어떠한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그나마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생화학과 분자생물학이었는데, 단백질을 생산하고 DNA와 RNA의 기작에 의해 통제되는 생물을 공부하고 있노라면 마치 프랜시스 베이컨이 감탄한 기계를 보는 듯 했다. 생화학 시험에서 RNA 코돈 하나를 밀려 쓰는 바람에 B+를 받았는데, 지금은 전공강의 중 가장 낮은 학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점수와는 별개로, 생화학 교수님은 공부하는 태도를 매우 높게 평가해주셨다.


진정으로 맞는 분야를 찾았던 때는 2022년 9월이었다. 개강 첫 주에 기초독일어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놀랍도록 흥미가 없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수강을 철회하고 오후에 들을 수 있는 아무 교양이나 신청하고 다시 강의를 들으러 갔는데, 그 강의가 "경제의 이해"였다(과거에는 경제학원론이었다). 경제의 이해를 가르치시는 교수님은 경제통계분석 강의를 가르치시는 교수님이셨는데, 강의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하는 것 같지 않다는 평을 듣는 교수님이었다. 나중에 경제통계분석 강의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평을 쓴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느꼈는데, 그 교수님은 자유로운 말투와는 정반대로 단계적으로 엄밀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나중에 확률론 원서를 보고나서 깨달았다). 중간고사 평균은 30점대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타 학생들의 강의평가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그다지 없다는 것을 배웠다(나는 90점대 초반을 받았다).


경제학은 놀랍도록 나와 잘 맞았다. 맨큐의 경제학이 주 교재였는데, 그 교과서는 내가 처음으로 문제까지 다 푼 교과서였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느낌보다는, 원래 있어야 할 지식이 나의 머릿속에 자리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교수님은 생물학이 아니라 경제학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하셨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2. 경제학 (2023~)


2023 1학기부터 경제학 전공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었던 과목은 미시경제학원론이었는데, 천재형 교수님이 가르치셨다. 천재형이라는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이, 교수님의 강의평은 2점과 3점 정도였다. 역시나 강의는 훌륭했다. 이 교수님은 살아숨쉬는 경제학 기계였는데, 경제학에 관한, 즉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교수님이셨다. 이 교수님을 첫 강의로 뵌 건 나에게 있어 대단한 행운이었다. 맨큐의 경제학을 다 공부한 나는 그다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중간고사날 시험지를 받은 나는 크게 당황했는데, 경제학 전공문제를 처음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아직 기르지 못했던 나는 높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이후에 교수님에게 경제학을 잘 공부하는 법을 물어봤는데, 답은 아주 간단했다. "일단 무작정 열심히 해보면 됩니다. 하다 보면 길이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학의 벽에 가로막혀 돌아서지만, 일단 벽을 넘어서면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경제학은 나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교수님이 시키는 것들을 말 그대로 무작정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2학년 때 보는 이준구 교수님의 미시경제학 교과서를 산 다음, 이준구 교수님의 K-MOOC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했다. 이준구 교수님 저서처럼 초심자가 배우기 쉽고 친절한 교과서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행운이었다. 김영산, 왕규호 저서는 100 페이지도 채 보지 못했을 것이다(1학년이 공부하기에는 수리적 접근 방식이 너무나도 생소했다). 물론 이준구 교수님 저서도 마냥 쉽지많은 않았는데, 경제학적 사고방식 자체에 숙달되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어떨 때는 한 페이지를 4시간 동안 붙잡고 보기도 했다. 그래도 경제학은 짜릿했다. 삶은 선택의 결과들의 집합이다. 선택에 관한 학문인 경제학은 나에게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훌륭한 도구를 제공했다. 한 달 반 정도 교과서와 씨름하고 난 뒤에 기말고사를 보러 간 나는 또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문제가 너무 쉬워서 한참 고민했던 것이다.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경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핵심 과목인 게임 이론, 노동경제학, 경제통계분석, 거시경제학원론, 거시경제학, 계량경제학 등을 배웠다. 슬슬 자신감이 붙어 더 공부해보고자 미시경제학 대학원 저서를 자신 있게 펼쳐봤는데, 그 교과서가 진정 경제학 교과서가 맞는지 의심해볼 정도로 알 수 없는 수식과 개념으로 가득했다. Open, closed interval, continuity 등 알 수 없는 수학 개념으로 가득해 한 페이지도 공부할 수 없었다. 경제학은 이미 나에게 포기할 수 없는 게임과도 같았다. 어떤 게임보다도 짜릿하고 유익했으며, 유일하게 나에게 내일을 살아갈 의미를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규칙을 알아야 한다. 누구도 골프장에서 아이언으로 번트를 시도하는 골퍼하고 같이 경기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알아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다시금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딛기로 했다.


3. 수학(2025 ~)


나는 친구들에게 이따금씩 학적으로 사이클링 히트를 친 명타자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하고는 했다. 휴학, 복학, 자퇴, 재입학, 학사경고, 부전공, 복수전공, 전과 등 해보지 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제적과 편입은 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나 드라마틱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친한 동아리 선배는 수학과 부전공을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선 졸업하기 싫어서 별 일을 다한다는 시니컬한 평을 남겼다. 아마 대부분은 경제학도가 왜 수학과 강의를 듣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경제학은 주식 투자, 통장 관리, 비트코인 투자와 동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과장되게 말하자면 응용수학이다. 수학 모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논문은 메이저 논문에 거의 등재되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가 한때 자신의 논문을 메이저 경제학회지에 투고하려고 했을 때 반려당했는데, 학회지의 답변이 다음과 같았다: "이건 경제학이 아닙니다."


따라서 경제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다면, 수학이라는 언어로 새롭게 경제학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2025년 1학기에 고등미적분학1, 선형대수학, 통계분석실습, 기하학, 미분방정식을 수강했다. 제일 인상깊었던 강의는 고등미적분학1이었다. 찾아보니 유명한 교수님이셨는데, 강의도 훌륭했다.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강의 중 가장 체계적이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금방 수학과의 공부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첫 시험이 제일 어려웠고, 갈수록 난이도가 하락했다. 기하학은 예상하지 못했으나 제일 흥미로운 과목이었다. 수학이라는 분야 전체를 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클리드 기하학, 쌍곡기하학을 중점적으로 배웠는데, 유클리드 V 공리가 다른 명제와 얼마나 많이 관련되어 있는지 처음 깨달았다.


수학과의 공부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오컴의 면도날로 수학을 공부하는 데 불필요한 모든 것을 밀어버린 느낌이었다. 물구나무 서기를 한 상태로 수학을 공부해도 별로 문제삼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떠한 면에선 이미 교수님들이 거꾸로 매달려서 강의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감한 도전과 탐구를 격려하는 분위기만큼 지성의 나무를 키우는 데 훌륭한 토양이 되는 것은 없다. 또한 수학적 사고방식은 문제를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수학과는 모순에 죽고사는 학문이다. 연역적 논증은 모순이 발생하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다. 잘못된 전제로 모순을 유도해내는 귀류법이 중요한 증명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현실이 이상적인 조건 아래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단계적으로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것은 삶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언제나 확고한 경험주의자였으나, 수학을 공부할 때면 순진한 플라톤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우리의 존재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수의 체계라는 아이디어는 무시무시하면서도 매력적인 수학철학의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학문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이다. 새로운 배움은 새로운 세상을 비추어 준다. 같은 인간 사회를 보더라도 심리학자, 경제학자, 행정학자, 법학자는 다른 세상을 보았노라 말할 것이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같은 것을 바라보더라도 같은 것을 보진 않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농담거리가 하나 있다: 물리학자, 화학자, 경제학자가 무인도에서 조난당했다. 해안가에서 우연히 통조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통조림 따개가 없었다. 이에 세 명은 각자 통조림 속의 음식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는 돌멩이로 통조림을 내리쳐 통조림을 따는데 얼마만큼의 힘이 필요한지 추산했고, 화학자는 바닷물로 통조림을 부식시키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계산했다. 경제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운을 뗐다. "일단 통조림 따개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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