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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Jul 31. 2023

인연 끝자락

오겡끼 데쓰까

  피천득의 <인연>을 읽다 퍼뜩 스친 옷자락. 젊은 시절에 만났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츠루코(鶴子). 벌써 사십 년 전 일이다.


  부여에 있는 시골집에 갔다 오던 시외버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 좀 바꿔 달라고 한다. 옆자리에 탄 사람이 일본사람 같은 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골 아주머니는 유창한 충청도 사투리로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고 그 앳된 일본 아가씨는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표정이 역력하다. 나보고 젊은 사람이 어떻게 좀 해보라는 것이다. 용감하게 자리를 바꿔 앉았다. 통성명하고 보니 백제의 역사와 와당(瓦當)에 대한 논문 때문에 현지답사를 온 일본 대학원생이었다.


  나 역시 그때만 해도 일본어는 인사말밖에 할 줄 몰랐다. 겨우 영어를 섞어 손짓, 발짓으로 소통했다. 부여에서 경주를 가려면 이 버스의 종점에서 내려 대전역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일본 여성치고는 키도 크고 매력적인 여자가 수도 없이 “하이 하이”소리를 내면서 고마워하는 통에 결국 대전역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택시비도 당연히 내가 지불했다. 외국 사람을 직접 안내하고 돈까지 써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그때 만난 츠루코(鶴子)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 데 처음 본 순간 활짝 핀 벚꽃 같다고 느꼈다.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았지만 얼굴과 몸짓은 어려 보였고 귀엽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에게 거꾸로 내가 두 살 많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 순간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해야 상대해 줄 것 같았다. 당시 내가 명색이 부여에서 태어났고 백제에 대하여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고 또 할 말도 많았다. 하지만 나나 츠루코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진땀 나는 노릇이었다.


  처음 만난 우리는 대전역에서 기차시간을 기다리는 서너 시간 동안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이야기했다. 결국 말을 다 하지 못해 기차표를 저녁 마지막 시간으로 바꾸고 역 근처 포장마차로 갔다. 어묵탕과 떡볶이를 먹으며 두서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되었다. 서로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되었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나는 플랫폼까지 따라 들어가 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못했다. 셀렘민트 껌 한 통을 건넸는데 츠루코는 내 손에 땀이 많이 났다며 하얀 손수건을 꺼내주고 그냥 간직하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대전역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기차는 단 5분도 더 기다려 주지 않고 야속하게도 그냥 떠나버렸다.


  츠루코는 귀국하자마자 일본어와 영문으로 편지를 보내왔고 나도 그때마다 정성껏 답장했다. 그녀의 편지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우리는 점차 내면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번 열 장 가까이나 되던 츠루코의 편지를 밤새워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점차 그녀의 마음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편지 속 대화에서 우리 두 사람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들 같았다. 그때부터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오사카에서 교직 생활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살던 할머니 한 분을 찾아가 일본 소학교 교과서를 교재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겨우 일본어에 대한 까막눈을 면하면서 츠루코와의 편지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츠루코는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나고’를 좋아했고 편지 속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왜 나를 좋아하냐고 했더니 처음 만난 날 악수할 때 느꼈던 나의 크고 두툼한 손이 너무나 뜨거워서 잊을 수 없단다. 나도 아마 한국어로는 대놓고 사랑한다고 쓰지를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나 일본어로 적는 데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한 번 그렇게 쓰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정말 연인이 된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 그녀는 유럽이나 하와이 여행을 할 때마다 하얗거나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또한 나를 만나러 김포공항으로 오기까지 했다. 나와는 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츠루코는 나보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해박하였다. 그녀의 눈을 통하여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도 그녀 때문에 처음 알았고 우찌모라 간조(內村鑑三)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인 나도 잘 몰랐던 한국의 김교신 선생, 김지하 시인 등도 알게 해 주었다. 해가 바뀌면서 우리가 철학과 사상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 속 내용도 더욱 진지해졌다. 당시 서슬 퍼렇던 유신헌법 아래에서 햇병아리 공직자로 근무하던 나에게 그녀와의 교류는 두렵기도 하고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지금도 친한 친구를 만나면 내가 일본 여자랑 결혼해서 일본으로 팔려 갈 뻔했다는 농담을 한다. 실제로 츠루코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자신과 일본에서 같이 살자고 프러포즈를 했고, 도쿄 한복판에 같이 살 집도 있다고 했다. 나는 걱정과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가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얼마 있지 않아 내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마지막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우체국 계단 밑 노점에 츠루코의 볼처럼 빨간 사과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카노조와 도구데아레 린고데스(그녀는 독이 든 사과야)’라고 수없이 중얼거리며 시내버스도 타지 않고 털레털레 걸어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불을 모두 끈 채 그녀가 보낸 LP 음반 중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오랫동안 마음을 달래야 했다.


  몇 해 전에 아키타를 방문했을 때 유서 깊은 츠루노온센(鶴の温泉)에 간 적이 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따뜻한 우윳빛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바람에 벚꽃이 하염없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내 가슴속에 묻은 그녀는 매사에 똑소리가 났던 만큼 아마 누구보다도 멋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백설 천지의 숲 속 벌판에서 주인공이 두 팔을 벌리고 외친다.


“오겡끼 데스까?”(잘 지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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