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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Jul 26. 2023

영랑사 새벽길

  세 남자가 한여름 야심한 밤에 모였다. 퇴직 후 재취업한 직장에서 같이 지내는 형님 동생 사이다. 요즘 신입직원들이 1년만 딱 채우고 실업급여를 받는다고 그만두기 일쑤여서 속상하던 참에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모인 것이다.  


  세대 간 갈등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시다 당진 이야기가 나왔다. 당진에 와보니 바다가 보여 좋았는데 들판도 넓다는 것이다. 산이 없어 서운하다는 말에 영랑사가 있다고 한다. 나도 이름만 들어봤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다. 말이 나온 김에 내일 새벽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영랑사를 찾아가는 새벽길은 한 여름의 물기가 가득 배어있다. 안개와 이슬을 헤치고 한참을 가다 보니 포장도 안 된 마을길이 나온다. 남의 동네로 잘못 들어왔나 싶어 망설였지만 내비게이션은 그냥 가라고 한다. 드디어 영랑사를 감싸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금방 그려 아직 마르지 않은 수채화 같다. 야트막한 산들이 연이어 감싸고 있는 작은 동산이 계란노른자 같이 포근하게 안겨있다. 잘생긴 소나무들은 푸르고 기운이 넘친다. 처음 왔지만 꼭 와 본 듯한 정겨운 산 그림이다. 내 고향 능산리의 큰 산소 같다.


  오른쪽으로 돌아 영랑사로 들어섰다. 어디서부터가 절간인지 아닌지 구분도 없다. 경계나 울타리도 없이 그저 사방이 툭 터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요한 정적을 깨고 웬 누렁이가 느닷없이 짖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디에서도 아무 인기척이 없다. 아직 불 켜진 곳이 없는데 대장처럼 서 있는 목조건물 한 채에 불이 환하게 밝다. 틀림없이 대웅전이다. 계단 몇 개를 올라 창문 너머로 엿보니 누군가 혼자 앉아있다. 모자인지 수건인지를 눌러쓴 채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앉아 있는 사람이 스님인지 객인지 잘 모르겠다.


  목탁 소리 대신 산새 소리를 들으면서 마당과 이어진 계단을 따라 뒷산으로 올라갔다. 소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흙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부지런한 산새들이 주고받는 청아한 노랫소리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갈수록 가파른 나무계단 때문에 힘겹다. 십여 분 남짓 오르는 데 벌써 심장이 벌렁거린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습기가 땀에 섞여 죽죽 묻어난다. 거미줄까지 겹겹이 길을 막았지만 포기하긴 이르다.  


  갑자기 아랫배가 요동치는 게 방귀가 나올 것 같다. 어제 먹은 술안주가 심술을 부리는 모양이다. 형님 동생 사이지만 아직 방귀까지 트고 지내기는 이르다. 맨 앞에서 허덕대다 슬며시 길을 터주었다. 평소 내 방귀 소리는 유난히 크다. 얼마 전 세 살배기 손자와 놀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방귀 한 방을 날린 모양이다. 자동차 장난감을 쥐고 있던 그 녀석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하부지 그게 모야를 외치며 정신없이 달려오던 장면이 떠오른다. 저 아래 영랑사를 향해 방귀를 뀌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했다가는 놀란 까까머리 동자승이 그게 모야를 외치며 냅다 달려올지 모를 일이다.  


  정상이다. 아래쪽으로 잘 다듬어진 진달래 밭이 펼쳐있다. 잘 닦여진 임도와 멀리 보이는 야산들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이다. 숨을 돌리고 천천히 내려오는 데 길이 평탄하다. 꼭두새벽에 산에 오른 일도 드물지만 이렇게 싱거운 산도 처음이다. 하늘이 조금씩 환해지면서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들이 잎을 털며 깨어나고 있다. 산길에서 내려와 보니 영랑사 입구 제자리다. 고목이 다 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맞은편에 서있는 건장한 은행나무를 올려보고 있다. 아침부터 영랑사의 오래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영랑사를 뒤로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새벽에 마주친 것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영랑사고 어디까지가 속세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절에 갔는지 산에 갔는지도 헷갈린다. 내가 산을 오르며 방귀를 뀌었던지 아녔던 지도 알 수 없다. 나의 주인은 분명 나의 마음이다. 아직 내 마음이 영랑사에 있는데 여기가 제자리인지 그곳이 제자리인지도 잘 모르겠다.


  영랑사 새벽길은 경계가 없다. 천계도 없고 속세도 없다. 내 자리도 없고 네 자리도 없다. 남은 내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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