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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21. 2023

친구의 '썰매'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 직장에서 거의 평생을 같이 지낸 친구가 있다. 퇴직하고 나서도 자주 만나니 꼭 형제지간 같다. 


  국가에서 주는 연금 받고 더구나 재취업을 하여 건강하게 소일하고 있으니 남 부러울 것 없는 친구지 싶다. 딸만 둘을 두었는데 큰 애는 런던에서 둘째는 뉴욕에서 공부를 마쳤다. 현재는 자매가 모두 런던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한 집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친구한테도 고민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딸과 대화해 보면 무슨 벽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일 년에 두어 차례 한국에 올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면 서로 뭔가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자라온 어린 시절 이야기라든지, 가족들의 이야기를 고백처럼 써서 딸들한테 보여주려고 한단다. 어쩔까 모르겠다면서 우선 몇 편의 글을 나한테 읽어보라고 보내왔다. 


  읽어보니 친구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고, 친구의 유년 시절에 대한 잔잔한 추억도 있다. 그중에서 ‘썰매’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글은 꼭 어린 시절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여기에 옮겨본다. 평소에 말수도 적고 피아노만 잘 치는 줄 알았는데 글 쓰는 솜씨도 제법이다. 피아노 소리야 연주가 끝나면 사라지고 말지만 친구의 글은 오래도록 내 가슴을 적시고 또 그 집 딸들의 가슴속에도 남을 것이다. 


 썰 매 

 시월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방학 동안 얼음판에서 지칠 썰매를 만든다. 우선 동네 뒷산에 올라가 곧게 자란 소나무를 베어 썰매 꼬챙이를 만드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키 스틱 같은 것이다. 이어서 집안 곳곳을 뒤져 나무로 된 사과 상자며 농사일에 쓰고 남은 합판 조각을 찾아 썰매 발판을 만든다. 발판 아래에는 두 줄이나 외줄로 각목을 잘라 대고 못질을 한 뒤에 앞부분은 얼음에 잘 미끄러지도록 사선으로 자른다.


  남은 것은 썰매 날을 만드는 일이다. 학교 교실의 미닫이 유리창 틀에 고정되어 있는 레일은 최고의 재료였다. 아이들은 학교 수위나 선생님 몰래 레일을 뜯어다 불에 구워 구부리면서 각목에 고정하여 썰매를 완성한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나면 시골 학교의 교실에는 유리창 밑에 있던 레일이 대부분 없어지기 마련이다.


  아침을 먹자마자 아이들은 썰매를 둘러메고 얼음판으로 달려갔다. 친구들 썰매를 따라 얼음판을 뱅뱅 돌기도 하고 누가 빨리 가나 시합도 하면서 온종일 얼음판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아직 썰매가 없는 아이들은 줄을 서서 썰매를 얻어 타려고 기다리곤 했다. 


  아뿔싸. 온종일 놀다 보면 오후가 되고 얼음판은 햇빛에 녹아 물이 흥건해진다. 그래도 썰매 타기는 그칠 줄 몰랐고 신발이며 양말은 물론 아랫도리는 온통 물에 젖기 마련이다. 젖은 차림으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볏짚을 가져다 불을 피워 젖은 옷이며 양말과 벙어리장갑을 말렸다. 


  겨울철마다 양말이며 신발은 성한 곳이 없이 불에 그을려 시커멓게 되고 여기저기 구멍이 났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겨울만 오면 썰매 탈 생각에 아무리 추워도 논이나 도랑에 얼음이 꽁꽁 얼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여기까지가 친구의 글이다. 친구의 글을 읽고 나니 올겨울에는 사방 천지에 얼음이나 꽁꽁 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 종일 그 친구와 함께 추억 속의 썰매를 타는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하루다. 한 번 전화해서 좋은 추억을 소환해 주었으니 저녁은 내가 산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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