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
내 결혼식 날, 마이크를 잡고 축가를 불러주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힘찼다.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 넘치는 열정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스스로 삶을 놓아 버렸다는 소식을.
물론 한 번씩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살기 힘들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말들을. 하지만 우리는 모두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런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정말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고, 단순한 하소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의 무심함이 후회로 남아있다.
친구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했다. 그 허망함이 죽음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수사했던 경찰을 찾아갔다. 뭔가 다른 진실이 있을 거라는, 억지스러운 희망을 품고서.
경찰은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저런 사고로 죽는 사람 많아요. '저 줄에 목을 대면 죽을까?' 하며 줄을 목에 대다가 순간 정신을 잃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 극단적 선택이라고 하기보다는 일종의 사고죠."
그때 알았다.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진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의도된 결말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사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친구를 떠나보내며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마음의 상처에서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깊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저런 일로 뭘 그렇게까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무리 상처가 커 보여도 그 깊이가 얕다면 사람은 언젠가 극복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그 깊이가 깊다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친구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나는 몰랐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만 안주했다. 그의 웃음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를 보지 못했다.
극단적 선택이 아니라 사고라면, 그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면, 누군가 그를 화나게 해서 감정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면, 누군가 작은 사랑을 나눠주었다면, 누군가 작은 웃음을 선물했다면... 그 모든 '만약'들이 지금까지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한강을 건널 때면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혹시나 그 사고를 내가 막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보이면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살펴본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고로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작은 관심을 기울인다. 누군가의 웃음 뒤에 숨겨진 아픔을, 누군가의 침묵 속에 담긴 절망을, 누군가의 말속에 스며든 외로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친구가 내 결혼식에서 불러준 축가는 이제 들을 수 없다. 친구들의 결혼, 돌잔치, 그런 소식을 들으면 떠나간 그 친구를 떠 올린다. 그 찬란했던 친구 삶이 아쉽고 애달프고 서러워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