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 간 것은 무엇?
"눈 보러 어디로 가야 돼요?"
아침을 거른 탓에 이른 점심을 먹었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있는데 ㅂ의 낭랑한 목소리가 전화기 속에서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헉, 이미 눈은 다 녹고 없을 텐데 이제야 눈을 보겠다고 우리 동네에 왔다고 하니 대략 난감이다.
어제저녁 강원도 지방에 폭설이 내려 산간지방의 도로가 막히고 고립된 마을이 있다며 뉴스에서 알려줬다. 어쩌면 재난이 될 법한 상황인데도 나는 내심 살짝 부러운 맘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눈 속에 갇혀 며칠을 지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실행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생각만 하다 올해도 지나가 버렸다. 하자고 들면 그리 큰 일도 아닌데 결단력 없음인지 소심함 때문인지 미적미적 미루고 있다.
그런 연유로 폭설로 인해 고립된 지방에 관한 뉴스가 나올 때면 은근슬쩍 지금 저기에 내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희망 사항이 담겨있어 눈여겨보게 된다.
가까운 이웃과도 단절되고 온 천지와 지붕에 하얗게 눈을 이곤 집 허리께까지 눈에 잠겨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있는 모습이 부럽다고 하는 나의 철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지방, 이곳에 눈은 먼 나라 이야기다. 몇 년 동안 눈다운 눈이 오지 않았다. 강원도나 전라도쯤에 폭설이 내렸다는 이야기도 역시 먼 나라 이야기임에 별반 다름이 없다.
별로 넓지도 않은 나라안에서 이렇듯 극적인 일기예보를 접하자면 어이없기도 하다.
여하튼 오늘 아침, 일요일인 탓에 늦게 일어났다. 베란다 창으로 무심코 앞산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산중턱께까지 온통 하얗다. 간밤에 눈이 내렸나 보다.
아직 취침 중인 옆지기를 얼른 깨웠다. 산에 눈이 왔으니 눈구경 가자고.
의기투합한 우리는 급하게 그러나 눈바람을 대비해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출발하자니 차 앞유리로 는개비가 달려든다. 빨리 서둘러야겠다. 비에 눈이 다 녹아버릴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창원과 장유 경계선에 위치해 있는 '불모산'은 주변의 산들 중에 꽤 높은 산이다. 산 정상에는 속된 말로 노을맛집이 있다. 노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전망대도 갖추고 있다.
그곳에 서면 장유는 물론이거니와 진해와 창원 등 사방이 다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이다.
특히 진해 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먼바다가 시야를 관통하곤 가슴에 다가와 안긴다.
바다는 내 그리움의 산실이기도 하기에 더욱 반갑다. 그래서 평소에도 가끔 그곳을 찾아가곤 했는데 갈 때마다 맘이 설레곤 한다. 더불어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은 덤이었다.
그런 불모산에 서둘러 중턱쯤 올라가니 비와 눈이 섞여 내렸다. 조금 더 올라가니 눈이 사푼사푼 새색시처럼 곱게 나린다.
그리고 드디어 하얀 설경이 펼쳐졌다.
노을맛집이 졸지에 설경맛집이 되어버렸다.
윗지방과 아랫지방의 눈도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데 산 하나를 두고도 아래와 위가 이리도 다르다니 참 요지경 속이다. 입춘이 지난 지도 한참인데 눈세상을 만나다니 그것도 남쪽 끄트머리인 이곳에서.
이제 막 겨울을 나고 곧 새싹을 틔울 준비에 여념 없었을 앙상하게 마른 가지들은 뜻하지 않게 하얀 눈으로 소담스레 옷을 지어 입었다. 순백색의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푸른 소나무는 어깨마다에 눈을 이고 그 무게를 저울질한다. 그러다 어느 한쪽이 기울면 우르르 눈을 쏟아 내려놓는 걸 보니 빈틈없는 저울인가 싶다.
그럴 때 나무 아래 있을라치면 졸지에 쏟아지는 눈 폭탄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어느 틈엔가 한발 빠른 사람들이 많이도 올라와있다. 그들은 갑자기 맞닥뜨린 풍경에 감탄사를 남발하며 눈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나도 그 속에 섞여 사진을 찍어댔다. 어디를 찍더라도 그야말로 선계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서둘러 가까이 있는 지인들에게도 자랑삼아 사진을 보내고 혼자보기 아까우니 어서 들 눈구경하러 오라고 재촉했다. 다들 놀라워하며 여기가 장유가 맞냐고. 매화꽃이 흐드러졌는데 눈이라니, 하며 믿기지 않는 듯 반문한다.
밤사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내린 눈을 도둑눈이라고 한다. 그런 눈이 내려 밤사이에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다니 자연은 참 변화무쌍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도둑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서 많이 쓰여왔다.
그러나 도둑눈은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도 세상을 은백의 환희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도둑이 맞는 것 같다. 모두가 잠든 밤에 살며시 눈을 뿌려놓은 것도 그러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설경을 선물하곤 거기에 혹한 이의 마음을 훔쳐가 버렸으니 말이다. 설경에 눈도 마음도 모두 뺏긴다.
잠깐 호사스럽게 경치를 즐기다 보니 사락사락 내리던 눈도 그치고 날이 개인다. 햇살이 구름을 비집고 나와 눈길을 주는 순간 눈은 순식간에 녹아 물이 되어 가지 끝으로 뚝뚝 떨어진다.
일장춘몽 같은, 떠남을 아쉬워하는 눈물 같다.
축제는 그렇게 끝났다.
오래도록 보고 싶은데 후둑후둑 쉬이 녹아 떨어지는 눈을 보며 아쉬운 맘을 접고 내려오는데 이제야 막 올라오는 이들은 어찌할꼬.
안타깝지만 도둑은 눈 깜빡할 새 사라졌다.
우리의 마음을 한 움큼 훔쳐 달아나 버렸다.
ㅂ에게 얘기했다.
"눈은 벌써 신기루처럼 사라졌다오. "
그가 무척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다음 기회가 또 온다면 꼭두새벽에 와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아쉬운 발길로 돌아갈 ㅂ을 생각하며 언젠가 또 도둑눈이 살며시 찾아와 그의 맘도 훔쳐가길 바라본다.
* 38회 한국수필작가회 대표작 선집 수록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