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맺힌 마음

어느 문해학교에서 본 글씨

by 서로봄

그분의 글씨는 늘 떨렸다.

연필을 꼭 쥔 손가락은 세월의 굴곡을 따라 굽어 있었고,

손등 위 힘줄은 수많은 시간을 견딘 나무뿌리처럼 단단했다.


언뜻 보면 평범한 팔순 노인의 손이지만, 그 손이 팔십여 년 동안 굳게 닫힌 문을 스스로 열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맨 앞자리에 앉아, 고단한 몸을 부여잡고 배움에 몰두했음을 말이다.


교실 안 햇살은 조용히 책상 위를 비추었다.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사각거림과 학습자들의 작은 숨소리가 모여 그분의 글씨를 감싸는 고요한 파동이 되었다.


며칠 전 수업 중, 지폐 속 위인들의 삶과 업적을 알려드리자

그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것도 모르고 갈 뻔했네…”


그 말에는 슬픔도 후회도 없었다.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 드디어 자신의 것이 된, 기쁨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배움이 이제야 내 차례로 찾아왔구나.'


그분은 아들에게만 배움이 허락되던 집안의 맏딸이었다.

이름조차 남의 손을 빌려 써야 했다.

자신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앞날을 열며 조용히 미소 짓던 삶을 살아냈다.


한 글자씩 적히는 글씨에는 기다린 세월과 쌓인 감정이 담겼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글씨는 결국 하나의 마음으로 모였다.


이제 그분은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쓴다.

천천히, 흔들리지만 또렷하게.

글자를 완성할 때마다 작은 숨을 내쉬며 미소 짓는다.

묻혀 있던 ‘나’라는 존재가 늦게나마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예를 다해 인사를 한다.

그 말에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격려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옆에서 작은 손전등을 비춰주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도 그분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문해학교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비가 오면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몸이 조금 더 흔들리겠지만 배움을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계단 하나하나에 과거의 간절했던 마음과 현재의 벅참이 겹쳐지고

시간의 무게는 손끝의 떨림으로 이어진다.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잡으면 손은 다시 가볍게 떨린다.

구불구불한 글씨 속에는 평생 하지 못했던 말이 숨어 있다.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던 이름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적힌다.

단단히 쥔 연필 끝에서 오래 묵은 마음이 흘러나온다.


오늘보다 내일 더욱 흔들릴 테지만 그분의 글씨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삶의 기록이다.

오랜 시간을 건너 늦게 도착한 배움이,

손끝에 맺힌 한 줄의 마음으로 마침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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