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온도는 차갑다

추락할 때 내 손을 잡아줄 이는 누구인가

by 서로봄


예전에 신뢰성 테스트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원형으로 둘러선 사람들 한가운데 서서, 그들을 믿고 눈을 감은채 뒤로 몸을 던지는 실험이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감는 순간, 내 근육은 뇌의 명령을 거부했다. 몸이 기울어지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그들을 믿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믿음이란 막연한 결심이 아니라, 서로의 안전이 담보되어야만 움직이는 냉혹하고 본능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며칠 전 '태양의 서커스'를 보았다. 딸이 준비한 나의 생일 선물이었다. 공연장의 공기는 흥분으로 들떠 있었고, 거대한 천막을 마주한 순간 기억 저편의 ‘동춘서커스’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곡예사가 줄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반면 곁의 어른들은 열광하듯 손뼉을 쳤다. 이제야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위험에 둔감해지는 게 아니라 계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안전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할 때 비로소 몸을 던질 지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위험의 크기를 정확히 아는 쪽이, 오히려 더 깊게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서커스를 단순한 오락으로 보지 않는다. 서커스는 신뢰가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예술이다. 이곳에서 실수는 곧 대가가 된다. 그래서 그들의 몸짓에는 변명이 없다. 찰나의 망설임조차 허용되지 않는 치열한 증명만 있을 뿐이다.


공중묘기 공연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냉정했다.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곡예사는 그 순간 모든 선택권을 내려놓는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나를 잡아줄 것’이라는 강력한 가정 없이는 어떤 동작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가정이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다시 허공을 선택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깨달았다. 신뢰란 서로를 좋게 보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었다. 상대가 실패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한 뒤에도 기꺼이 함께 가겠다는 태도였다. 서커스는 믿음의 이상향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라는 처절한 현실을 보여준다. 성공의 환희보다 먼저 공유되는 것은 언제나 추락의 위험이다.


그래서 서커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균형을 잡고, 누군가는 밑바닥에서 받치며, 누군가는 아찔하게 날아오른다. 질문은 늘 같다. “내가 추락할 때, 누가 그곳에 있을 것인가.”


믿음은 따뜻하지 않다. 오히려 차갑고 계산적이다. 상대가 나를 받지 못할 가능성까지 계산에 넣고서도, 내 생존을 맡기겠다고 결심하는 선택이다. 그 서늘한 결단 없이는 어떤 협력도, 관계도 시작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뢰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그것이 안전이라는 측면에서는 합리적일지도 모르겠으나 협력과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었다. 몸을 던지지 않으면 추락의 위험은 없으나 건너갈 수도 없다. 모두가 안전만을 추구한다면 이 사회는 정체되고 말 것이다.


결국 불신은 계약도 사랑도 최소한의 약속도 지킬 수 없다. 어쩌면 신뢰는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요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신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뢰를 하지 않으면 더 큰 손실에 직면할지도 모르기에 위험을 감수하는 건지도. 그래서 신뢰는 비합리적인 용기가 아니라 확률을 선택한 끝에 결단하는 위험투자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각자의 작은 서커스를 반복한다. 확실한 약속이 없는 세계에서, 끊어질 듯 팽팽한 신뢰의 고리에 몸을 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막연한 용기가 아니다. 조건의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의지다.


오늘도 우리는 추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허공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민다. 잡힐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손을 뻗는 그 찰나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가장 냉엄한 증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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