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영

우뻬인의 기억

by 서로봄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 잠자고 있던 론지를 발견했다.

청록빛 바탕 위에는 화려한 열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 돌아온 뒤 곱게 접혀 있던 천은, 잊고 지냈던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치마를 펼치자, 기억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때의 공기, 빛, 바람이 치마폭 위로 되살아났다.


가끔 생각했다. 전생이 있다면, 아마 나는 버마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그곳은 인연이 닿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땅”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내 마음이 먼저 그곳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발을 디딘 순간, 타향살이에 지친 몸이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함이 나를 감쌌다.

떠나온 뒤에도 마음 한 조각이 그곳에 남아,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만달레이에 도착한 날, 해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여름 오후의 더위는 한결 누그러졌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나는 곧장 우뻬인 다리로 향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그곳에서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노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매캐한 흙내음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양옆으로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허름한 노점에서는 낯선 음식 냄새와 생소한 언어가 뒤섞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사람 사는 곳’을 상기시키는 풍경이었다.


드디어 마주한 우뻬인 다리.

넓지 않은 호수 위에 티크나무로 엉성하게 놓인 목조 다리였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흔적이 곳곳에 남아, 일부는 벌어지고 삭아 있었다.

잠시 실망감이 스쳤다.

“이게 그토록 유명한 다리인가?”


하지만 옹이가 닳은 나무 위로 스며드는 햇살과,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을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를 업은 여인, 자주색 가사를 두른 스님, 세상 곳곳에서 온 여행자들.

그 다리 위에는 경계가 없었다.

누구나 잠시 머물다 가는, 시간과 사람의 통로 같았다.


맨발에 닿는 나무의 결은 미세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수많은 발자국이 남긴 체온처럼, 나무의 숨결이 내게 온기를 전했다.

온몸으로 따스함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다리를 건넌 뒤, 호수가로 내려갔다.

작은 목배들이 강변에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기대와 설렘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마지막 숨결을 내뿜었다.

사방이 붉은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에 내 마음이 푹 잠겼다.

잔잔한 물결은 윤슬을 그리며 흔들렸고, 사공들의 얼굴에는 순박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사람들이 왜 우뻬인의 일몰을 찬탄하는지.


호수 위에는 또 하나의 다리가 있었다.

물속에 비친 다리의 그림자가 위와 아래로 맞물려, 하나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이 포개지는 찰나.

빛과 물, 사람의 숨결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완벽한 투영의 순간이었다.


작은 조각배 위에서,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잔잔한 물과 내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노을은 서서히 사라지고, 붉은 황금빛은 검게 바래갔다.

모든 축제가 끝난 듯, 호수의 표면은 잠잠해졌다.


나는 사공의 거친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얼굴 위로, 노을을 닮은 미소가 잔광처럼 피어올랐다.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도, 우뻬인의 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시간을 봉인한 듯,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서 조용히 숨 쉬던 사람들과, 일렁이는 물결의 소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았기에,

오히려 오래된 다리의 모습이 위대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것이 선명했다.


그곳은,

물 위에 정지된 실루엣으로 투영된

황금빛 그리움이었다.


론지를 다시 곱게 접어 서랍 속에 넣었다.

하지만 그날의 감동은 쉽게 접히지 않는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천천히 투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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