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가 전하는 말
태평양의 깊은 물결 속,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헤엄치던 작은 멸치 떼.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긴 여정 끝에 내 식탁 위에 오르게 되리란 걸.
바다의 짠내를 품은 채 햇살 아래 마르고, 도시의 소음을 건너온 가벼운 몸짓들이었다.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그들은 다시 작은 파도를 일으키고 나는 그 한 줌의 멸치를 바라본다.
짧은 생 속에 담긴 시간의 무게가 묵직하다.
여름의 끝자락,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던 오후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 지금 언니집 앞이에요. 잠깐 나올 수 있을까요?” 가끔 차를 함께 마시던 이웃이었다
문을 열자, 그녀가 멸치 한 상자를 안고 서 있었다. “전에 제가 팔 다쳤을 때 제게 반찬 해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그때 참 따뜻했어요. 늦었지만 감사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몇 번의 계절이 지난 후였다. 더구나 나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일상 속에서 가끔 주변의 불편한 이웃을 보면 반찬을 나누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평범한 순간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멈춰 세웠다. 작은 나눔이 얼마나 길게 타인의 마음에 머무는지를, 그제야 실감했다.
비릿한 멸치 상자를 안고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은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의 첫 직장이었다. 그곳의 책임자였던 그는 나보다 두 해 위 선배였다. 쾌활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내 서툰 일에도 야단치기보다 등을 두드려주던 따뜻한 이였다. 그와 함께한 시간들은 내 인생항로의 단단한 첫 시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 막내 시누이가 집에서 놀고 있어. 다른 데 보내긴 어려워서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쳐야 할 것 같아.” 미안한 눈빛이 전해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때 나는, 어디서든 내 자리를 만들어갈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별은 담백했다. 그는 나를 다른 곳에 소개해주었고, 나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얼마 후 어느 휴일, 그 학원 앞을 지나던 날이었다. 문득 그가 떠올라 예고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교실 안, 작은 책상 위엔 멸치 한 접시와 고추장 종지, 그리고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단출한 광경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울렸다. 그가 무안해할까 싶었지만,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왔다. 같이 밥 먹자.”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퍼서 내 앞에 놓고 수저를 건넸다. 거절할 틈도 없이 우리는 마른 멸치 한 줌으로 식사를 나누었다.
유리창으로 햇살이 스며들고, 따뜻한 밥 냄새가 마음 한구석을 천천히 채워갔다. 그 순간, 멸치의 작고 검은 눈이 내 마음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으로 마른 멸치뿐인 밥상을 차린 것인지 묻지 않았다. 다만, ‘함께’라는 마음 하나로 내어놓은 그의 진심이 분명히 느껴졌다.
고추장에 찍은 멸치의 짠맛과 뜨거운 밥알의 온기가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그 맛은 뜻밖의 위로였고, 인생의 한 지점에서 문득 돌아보게 되는 존재의 여운 같았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밥상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진심이란,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진심은 담담히 전해지고, 아무 말 없는 순간에도 제 빛을 드러낸다.
지금 나는 다시 멸치를 바라본다.
그들의 은빛 잔등을 눈길로 어루만지며 문득 생각한다. 이 멸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지금 내 여정의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어쩌면 멸치가 내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네 삶을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네가 생각한 대로 잘 가고 있느냐고.
오늘 저녁, 고추장 한 숟가락을 덜고 멸치 한 줌을 식탁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들을 떠올려 봐야겠다.
내 곁을 지나갔던 손길들, 나도 모르게 내어주고 다시 받았던 마음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조용히 되짚어보려 한다.
멸치의 짠맛은, 삶의 짠맛을 닮았다.
눈물이 맺힐 듯한 그 짠기 뒤에 남는 감칠맛처럼, 기억은 그렇게 오래 마음에 머문다.
이제 멸치 한 마리는 나의 지난 시간과 존재를 잇는 한 가닥의 끈이 되었다.
나는 지금, 이 마른 멸치에게서 삶의 조용한 울림을 듣는다.
그 울림과 함께, 태평양의 은빛 물결이 내 안에서 잔잔히 일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