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딸나무도 때죽나무도 다 아름답다
늦봄의 햇살이 베란다 난간에 조용히 내려앉던 날이었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 바깥을 바라보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단 한쪽에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수년째 같은 단지에 살면서도 이 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눈을 좁혀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니 꽃의 생김새가 또렷해졌다. 넓은 꽃잎이 겹겹이 모여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산딸나무였다.
궁금해져 곧장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막상 나무 아래에 서서 올려다보니 꽃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하얀 꽃자락이 어슴푸레 드러날 뿐이었다. 알고 보니 산딸나무 꽃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가장 잘 보였다.
아래에서는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잎에 가려 꽃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매일 지나치던 길목에 있었으면서도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베란다에서 산딸나무를 내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하늘을 향해 피어난 꽃은 접시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고, 네잎클로버를 닮은 모양으로 햇살을 받고 있었다.
은은한 꽃빛이 햇살을 머금고 환하게 번졌다. 같은 꽃이지만 보는 자리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 주었다.
며칠 뒤, 동네 공원 산책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스치며 잎을 흔들었다. 무심코 올려다본 나뭇가지 끝에 작은 흰 꽃들이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종처럼 생긴 꽃들이 가지 끝마다 달려 있었다. 때죽나무였다.
이 꽃은 산딸나무와 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성한 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작은 종 모양의 꽃들이 조롱조롱 매달린 모습이 또렷이 드러났다.
바람이 지나가면 꽃들은 가볍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맑은 방울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조용한 음악처럼 번져 왔다.
문득 생각했다. 세상에는 위에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모든 꽃이 같은 방향으로 피어나지는 않는다. 어떤 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어떤 꽃은 아래로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다를 뿐, 어느 것도 부족하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사람도 그러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앞에 나설 때 자신의 빛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조용한 자리에서 더 밝은 빛을 낸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눈에 띄는 자리에 서 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가일 것이다.
산딸나무도, 때죽나무도 제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꽃을 피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그 꽃 위에 머문다.
우리 또한 그렇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라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작은 의미로 남는다.
그래서 오늘도 가만히 기대해 본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조용히 꽃을 피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