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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Nov 26. 2023

클레의 천사, 공간의 경계 위를 날다.

공간의 경계에서.

스무 해 전 어린 아들들과 구룡마을과 타워팰리스를 찾았다. 매번 출근길에 마주치던 강렬한 인상을 받던 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로 하나를 경계로 극으로 비되는  습을 좀 더 가까이서 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다양한 삶의 모습 어린 아들들 나에게  좋은 자극제로 와닿기를 원했다.


타워팰리스는 당시 한국사회의 부유층을 상징하는 초호화 주거단지였다. 입주민에게 제공되는 호텔식 편의시설과 서비스, 그리고 정치, 경제, 연예계 유명인사들이 즐비하게 입주해서 항상 세인의 관심 집중되는 곳이다. 타워팰리스는 성공한 계층을 위한 공간다.


반면 길 건너편 구룡마을은 오랫동안 중단된 도시개발사업을 위해 철거될 운명을 지닌 무허가 판자촌이다. 굴곡진 능선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나무판잣집들이 태롭게 서있고 비닐을  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다. 문 앞에 놓인 양동이, 냄비, 주전자, 의자 등이 에도 이곳 누군가의 삶의 터전임알려주었다.


포장도 안된 거무스르한 흙바닥 길을 밟으며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타워팰리스가 대한 성벽을 이루며 웅장하게 서있는데 갑자기 처연다. 함께 온 어린 아들들은 빨리 가자고 보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글픈 감정이 들었다.

삼십 대 부모였던 나는 어린 아들들에게 같은 하늘아래 펼쳐지는 대비되는 인생실상을 보여주고 싶었나는 그것을 가르는 경계의 실체를 생생하게 확인하고 싶었는지 르겠다.


당시의 나는 인생이란 공평하게 출발한다는 '믿음'과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설픈 자본주의 신봉자였다. 그런 논조의 시각으로는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상황들을 경계를 중심으로 한쪽은 인생의 승리자로 다른 한쪽은 실패자로 밖에 인식하지 다. 


도시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공간은 사람을 분리한다.

분리된 공간은 사람들에게 차등적 감정을 부추긴다.

 

언젠가 우연히 서울 상도동 재개발현장의 가장 높은 능선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도시풍경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공간의 경계 목격했다.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을 가르는 확연한 경계 살아서 꿈틀거렸다.


거대한 아파트의 경계 앞에서 연립주택과 단독주택 공간 들리지 않는 비명 속에  파괴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도시는 침범하고 점령당하며, 파괴되고 재탄생하는 혼돈의 충돌 속에서 시각각 계의 영역들은 변해다.  

   

난파선 같은 단독주택의 능선 위에 홀로 서있던 나는 거대한 파도처럼 모든 걸 때려 부수며 밀려오는 아파트 공간이내 압도당했다. 파편 산산이 조각난 단독주택물들 사이로 그저 체념이 한껏 묻  깃발만이 무기력하게 펄럭다.  

현대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폐쇄된 경계이다. 닫힌 경계 안에서 '비틀어진 목재'와 같은 인간들은 끊임없이 '빗장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도시는 아파트로의 편중된 삶을 부추기며 비틀려 간다.

빗장공동체(gated community): 출입구가 있고 차량과 보행자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주택단지로 주로 중상층 이상이 거주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늘날의 도시들은 철저하게 폐쇄된 경계 위에 건설된다. 그 경계를 따라 차등과 차별이 난무한다. 빗장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또다시 생겨난 경계의 벽을 따라 늘 원점을 맴도는 듯한 현실 앞에 역부족 이내 좌절하고 만다.


삶을 지속적으로 다시 만들어가는 작업은 늘 파열과 단절을 수반한다. 지어진 것들과 거기에 맞춰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비틀림과 어긋남은 존재한다. 그래서 늘 불편하다.


모든 것을 파멸시키듯 재개발해서 들어선 아파트 공간에서의 삶 속에도 주거공간처럼 사람들 가슴속에도 경계가 존재했다. 같은 층 이웃이지만 언제 이사를 가고 오는지 알지 못한다. 궁금해하지도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익과 관련된 일 이외에는 '무관심'하다. 가면을 쓴 채 서로 개입하지 않으며 감정을 차단한 채 살아간다.


칸트는 인간은 타인과 연합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타인을 떼어 놓으려는 강한 성향도 갖고 있다. 그는 이런 상반된 긴장을 "비사회적 사회성"이라고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회로 들어가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를 깨부수려고 위협하는 공격적 성향"을 의미한다.


'비사회적 사회성'을 극복하려면 상호거리를 설정하고 사람들을 냉정하고 비개인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삶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차이에 무관심해진 사람, 그리하여 소소한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친근한 이방인처럼 말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주 봐왔던 존재가 된다.


여러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의미의 명료함보다는 의미의 풍부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다른 경계 앞에서 소통과 상호작용하는 끝없는 과정을 시도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협력하는 법을 배우며 재탄생하려 노력하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변화의 바람에 떠밀려 앞을 향해 날아가지만 뒤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가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닮아 있다. 기회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지만 불편함에 늘 시선은 뒤로 향한다.

1920년 파울 클레는 천사가 굶주리고 괴로워하면서 팔을 뻗고 있는 <새로운 천사>라는 모노프린트화를 제작했다. 벤야민은 이 그림은 "앞으로 떠밀려가면서도 뒤를 바라보는" 형체를 담았다고 표현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북미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황폐화되었다. 높은 담보대출 이자를 갚아 나가야 하는 고급주택에서의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과거 1960년대 초소형주택에 대한 대안적 생활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택으로 한몫 잡을 수 있다는 꿈이 사라지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주거비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자 살림을 줄이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과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함께 모여 협회를 조직하고 집 짓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자본과 능력의 범위 내에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작은 오두막부터 조립식 주택, 컨테이너원두막 등 다양한 초소형주택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수작업으로 집을 짓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손수 지은 방에 앉아 느끼는 만족감으로 그 시간 모두를 보상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유명 유튜버가 돌집을 짓는 영상을 시청했다. 디자인과 건축적 전문가로 보였다. 오래된 돌집을 구입해서 장기간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채석하고 돌을 하나씩 쌓아가는 과정은 몹시도 느렸지만 꼼꼼하게 작업하는 모습은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최종 완성 돌집을 이미지 랜더링한 사진으로 보여주며 설명하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마음속에 완성된 아름다운 집의 이미지를 담고 뿌연 돌가루가 날리는 현장 속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은 수많은 구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닫힌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가 지어준 공간에 스스로를 맞추어 사는 불편함을 당연스레 감내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창조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만한 빗장공동체가 외면한 경계 밖 파멸된 공간 속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공간에서 가장 큰 행복과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곳이 최고급 아파트이든 오두막이든 말이다.

<martjn doolaard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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