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놓인 경계적 삶이다. 그래서일까.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를 향한 염려가 넘실대는하루를 사느라 갈피를 잃어버리기일쑤다.
허니문이 있던 정겨운 11월이었다. 하지만 택배를 시작하면서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무겁고도 힘겨운 시절이 되어버렸다.
짙은 어두움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새벽마다 택배 하러 가는 반복된일상이다. 때론 지겨움으로, 어느 때는 '시지푸스'가 당한 끝 모를 형벌처럼 모질기만하다. 반복된 일상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면 저절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향하곤한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만일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어느 특정한 시점에 도달한 우리는 후회를, 미래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아쉬움과 함께진하게 내뱉곤 한다.
인생이란 어떤 사소한 행동이나 사건으로부터 여러 갈림길은 시작된다. 삶의 엄청난 사건들도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한낱 사소한 일들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다. 삶의 사건들은 우발적인 사고와 의미 없는 상황들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우연한 계기로 책상과 모니터 앞을 떠나, 무수히 쏟아지는 쩔배(절임배추)와 20kg 쌀, 과일상자들과 힘겹게 씨름하는 '일상'과 가장 높은 매출이라는 '보상'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단순한 하루를엮으며 살아간다.
사람이란 과거를 통해 위로를 바라고 추억하며, 미래를 향해 가능성을 얻고자 행동하지만 후회와 자책의 고통만 남는 경험을 번복한다.
시간이라는 경계 앞에서 인생은 그렇고 그렇게 후회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걸까.
큰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가 조만간에 구조조정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나름 대비책으로 여기저기 면접을 보고 기다리던 중인데 요즘 IT업계의 채용시장이 급속하게 얼어붙어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사회생활이 길어갈수록 점점 불안해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젊은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안정'된 사회의 그늘을 찾아서 부단히 애쓰며 일희일비하던 과거의 모습이 오늘도 그대로 세대를 이어가며 반복 중이다.
미래를향한 삶에 대한 불안으로 점철된 인생의 고된 삶들이더미를 이루고 역사가 된다. 그런 역사는 '시간은 늘 반복된다.'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는 미로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얻기 위해 과거로 탈출을 감행한다.
최근 타이타닉호 일등석 저녁만찬 메뉴판(1912년 4월 11일)이 경매에서 8만 3천 파운드(한화 약 1억 3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과거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거액의 경매가만큼이나 높다. 낭만적이고 유명한 시간의 흔적이 묻은 비극적 조각조차도 소유하고픈 갈망들은 또 하나의 신드롬을이룬다.
하지만 70년대에 사라진 '빈대'의 출몰에 극심한 공포를 보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과거의 흔적을 대하는 사람들의 민낯을 보게 된다. 한낱 모기와 같은 흡혈해충에 불과한 빈대는 과거의 가난과 결핍의 상징이다.
화려한 추억의 달콤함은 원하지만 현실보다 더 힘겹고 궁핍했던 고통스러운 과거의 사실들은 진저리 치듯 외면하려 한다. 과거를 향한 레트로 열풍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그저 현실 도피를 위해 달콤한 위로만을 취하려는 편식적인 욕망의 일탈일 뿐이다.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만 생겨나는 감정이 후회이다. 후회란 어쩌면 더 나았을 수도 있었던 대안들을 고통스럽게 갈망하는 것이다. 때론, 후회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계기를 얻기도 한다.
코넬대학교 사회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와 비키 메드벡은 후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시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대해서는(예를 들자면 지난주에 있었던 일)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후회를 많이 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에 대해서는(몇 달 또는 몇 년 전에 있었던 일) 무언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한다.
내가 행동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오래 남는다는 의미이다. 계속해서 남는 후회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기회가 있다는 신호인 셈이다.
건전한 후회란 벌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과 심적 고통의 절충점에서 생겨난다. 후회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비판에 따른 고통은 자연스레 생겨난다. 기회의 가능성을 위해 기꺼이 자기 각성의 고통을 감내할 통제력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톰크루즈 주연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 edge of tomorrow.>에서 주인공 홍보장교 빌은 우여곡절 끝에 시간을 리셋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전쟁에서 위기의 순간에 직면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마다 다시 특정한 과거시점으로 되돌아가는 '타임루프'에 빠지게 된다.
죽임을 당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상황의 무한반복 속에서 그는 점점 강인한 무적의 군인이 되어간다.
택배를 처음 하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힘겨웠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 지금은 모든 게 능숙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능숙함과 여유로운 상황 대처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택배가 힘겨워질 때면 고생했던 택배초기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어 지면서 위안이 된다.
삶의 윤곽을 하루 종일 마음속으로 품은 채 천천히 다가가 바라보면 그 모양이 점점 더 분명하고 뚜렷해진다. 일상의 소소한 상황들은 시간을 중심으로 주변에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코발트색'이 되고, 불완전한 생각들은 적포도주처럼 진한 붉은색으로 포도주처럼 따뜻하고 묵직함이 느껴지는 '암적색'이 된다.
시간이란 우리가 인생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것들이 우리 가슴속에서 더 오랫동안 지속되게 만들어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의 진실됨이 서서히 제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풍경은 풍미와 색깔, 향기가 뭉친 덩어리이고 몸은 여기서 활력을 얻는다. 느린 시간은 위로가 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점철되는시간의 경계 앞에서 사람은 회복이라는 꿈을 꾼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더미, 입자, 먼지의 형태로 흔들리는 그 잔해와 함께 살아가기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살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충동이다.
그냥 긴장을 풀고 인생의 흐름을 즐기자.
다시 말해서 운명적이든 아니든 우리의 뇌가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그 의미들을 즐겨보자.
운명에 연연하지 말자.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침묵하며 서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