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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Nov 12. 2023

별이 빛나는 밤에.

신(神)의 경계에서.

아들케이크 등으로 결혼기념일을 준비해 줬다. 막내아들이 "28년간 엄마아빠 서로 헤어지지 않아고마." 농담다. 그러자 아내 정색한다. "엄마는 단 한 번도 네 아빠와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지?". 나에게 되묻는 아내를 보면서 슬그머니  속으로 행복해졌다.


선물 같은 아내와 살아온 지 2년이 모자란 30년이다.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슬며시 곁눈으로 아내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눈가에 희미한 세월의 흔적 보여 짠하다. 안쓰러움에 슬며시 잡아본 이 택배 하며 많이 상한 것 같아 그만 가슴이 저민다.


아내를 고생시키는 현실 가슴 아프지만 다가오는 우리의 노년은 두렵기만 다. 최근 들어 장인, 장모, 처외조모의 장례를 차례로 치르면서 <죽음>이란 실체가 우리의  로 성큼 들어 것 같다. 


노년 들어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부모님들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커다란 근심과 부담을 안겨준다. 중년인 우리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 그렇게 다가왔다.  


아내와 함께 귀가하던 어느 날,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폭우가 쏟아졌다. 마치 과거에 쌓인 회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격렬하게 교차하며 앞을 가리는 우리 현실 같다.


차량비상등을 켜고 돌아오는 동안 곁에 앉은 아내는 불안해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놀리며 무사히 집으로 되돌아왔지만 전국에서 그날의 폭우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뉴스를 보면서 죽음이란 늘 우리 곁을 스치듯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 실감다.


매섭게 쏟아지는 폭우 무너지는 집안에서 약봉지만 급히 챙겨 나왔다는 한 노인의 사연에서 '이생'에 대한 사람의 본능적인 집착을 보게 된다.


중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자연인 관련 방송에 출연한 한 부부가 폭우로 인한 재난에 변고를 당했다는 소식 우리 안타깝게 했다. 사나운 세파를 피해 산속에 숨어들었는데 폭우재해에 그만 생을 달리했다는 사연이 너무나 기구하다.

            

삶의 한복판에 죽음은 늘 있다. 사람들은 얼마나 살지,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에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한다.


사람들 부분 죽음이란 육체적인 파멸이라고 긴다. 닥쳐온 죽음 앞에서 당황하며 두려워한다.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진정한 죽음'에 대한 착각 때문이다.


우리는 어미의 자궁에서 수의에 싸여 있나니 몸과 함께 수의도 커진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이 수의에 싸인 몸으로 태어나니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무덤을 찾기 위함인 까닭이다. <죽음의 결투/ 존 던>




어두워진 저녁시간까지 한참을 일하는데 젊은 엄마와 남자아이가 함께 다가와 말을 붙였다.


장갑을 끼셨으니 도와달라고 한다. 일손을 멈추고 따라가 보니 아파트 내부도로 바닥 위에서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와 엄마는 차마 지나치지 못하다가 도움을 청한 것이다.


차갑고 뻣뻣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작은 새의 따스한 체온은 장갑을 뚫고 느껴질 만큼 강렬했다.

도로변 수풀 속으로 조심스레 내려놓자 그제야 아이와 엄마는 연신 감사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바쁜 배송으로 인해 서둘러 되돌아왔지만 배송하는 동안 손바닥 위에서 꺼져가던 작은 생명이 발산하던 온기가 자꾸만 생각났다.


죽음 앞에서 작은 새의 마지막 호흡은 너무나 강렬다. 작은 새 조차도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모든 기운을 모아 호흡하다가 서서히 체념하듯 죽어가는 모습은 장엄하기만 다.


최근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드롱이 스웨덴에서 안락사를 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끔찍하다. 나이라고 불리는 것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며 '산송장'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죽기를 선택했다. 

    

몽테뉴는 죽음이 갑자기 닥쳐와 자녀교육이나 딸의 결혼 같은 계획을 망쳐놓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져 심각한 뇌진탕 증세를 보였다.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필사적으로 생명에 매달려봐야 얻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슬며시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피투성이가 된 내 몸이 보였다.

윗옷은 내가 토해낸 피로 온통 얼룩이 졌다.

... 내 목숨이 입술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목숨을 거들어 밀어내려고 했다.

기운이 빠지는 느낌, 내 혼이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는 느낌이 좋았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일까.


삶은 정신과 육체가 잘 조화되어 화음을 이루는 정과 같다. 죽음은 삶을 파괴하는 것이 니다.  히려 죽음은 삶과 상호작용한다. 죽음이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우리의 은 죽음을  배경으로 한층 더 강렬해지고 한없이 소중해진다.


죽음의 경계 앞에서 우리 삶이 무한하지 않고 한정적임을 알게 된다. 현실이 구차하고 모질어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생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위로를 받고 환희를 느낀다. 코발트 빛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 손내밀면 잡을 듯이 가까이 내려오고 강과 마을 그리고 강둑을 걷는 연인도 별빛에 흠뻑 젖어 있다.

고흐는 이 그림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화가의 삶에서 죽음이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있어.

언제나 별을 보고 있으면 참 단순한 꿈을 꾸는 기분이 들어.

도시와 마을이 표시된 지도 위 검은 점들을 보며 꿈을 꾸듯이.

왜, 왜 프랑스 지도에 찍힌 검은 점들에 가듯이 창공에 반짝이는 저 점들에 쉽게 가닿을 수는 없는 걸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고 기차를 타듯,

우리는 별에 가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걸지도 몰라. 

.. 증기선이나 승합마차, 기차 등이 지상의 교통수단이듯,

콜레라나 신장결석, 폐병, 암 등이 천상의 교통수단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아.

나이 들어 조용히 죽는 건 걸어서 천상에 가는 방법이야.

       

고흐는 죽음을 통해 그림 속 별처럼 모든 것을 영원히 빛나게 하는 존재가 되는 꿈을 고 있다.


알베르트 카뮈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집행 전날 밤 쏟아지는 별빛아래서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 회상하며,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는 죽음을 앞두고 엄마가 느꼈을 저휴식과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도 죽음 앞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픈 강렬한 열망을 가지다.


밤하늘 같어두운 죽음을 배경으로 인생은 삶 속에 별처럼 빛나는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을 마주하며 인생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로 되돌아간다.



죽음이라는 경계에 설 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하게 된다.


죽음은 이기적인 하늘아래 인간이 자기 의지로 성취할 수 있는 것 너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죽음은 신(神)이 오만한 인간의 행로를 차단한 최후의 경계이다.


 경계 앞에서 속에는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신중하게 우리의 삶에 몰입하고 관찰하는 것. 삶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의 정답임을 깨닫게 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늘 열어두어야 하는 존재이다.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거나 일상 속에 감춰진 목적을 찾는 대신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초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존재의 확장이란 무엇에 관심을 가질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 어떤 분야가 관심을 가질만한 분야인지 더 깊고 의미 있는 몰입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언제나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조차도 죽음이라는 본질보다 그 외적인 것들에 더 많은 눈길을 주고 비교하며 스스로 상처를 받으며 산다.


죽음 앞에서는 거액의 조의금도, 아름다운 실크 옷도, 비싼 외제 차도, 좋은 직장도 그 모든 의미가 퇴색하고 소멸된다. 죽음은 모든 가치를 원점으로 초기화하기에 그 앞에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 간에 모든 인생은 맨몸의 가장 공평한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 우리가 죽은 뒤에 태어날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싶어 할 정도로 주제넘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의 호평에 기뻐하고 만족할 정도로 경박하다.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환호에 취한 채 개선하는 장군의 뒤에서 '너의 죽음을 생각하라' 노예의 외침은 오늘도 공허하게 허공 속으로 산산이 흩어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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