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하며 사는 걸까
<대상상실>이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상실하는 상황들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철부지 사회>를 쓴 '가타다 다미미'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포기를 할 줄 모르는 '성숙거부자들', 다른 말로 <대상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모두가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철부지'가 되어버렸다"라고 우려했다.
철부지처럼 삶이 상실과 결핍으로 얼룩졌다며 투정 부릴수록 '자기 연민'이라는 감정 속에 빠지게 된다. '자기 연민'이란 오직 자신만을 불쌍하게 여기는 유아기적 감정이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끊은 채 자신의 내면 깊이 매몰된 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 움직임을 잃어버린 사람들.
참혹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했던 빅터 플랭클에게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을 받지 않으려 생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밖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중에서>
세상의 간섭이 싫어서 선택한 나의 택배세상이지만 이곳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주 7일 배송>에 반발한 택배기사들이 앞다투어 '택배노조'에 가입했다. 그리고 휴일배송과 '까대기(상품분류작업)'를 거부했다.
그동안 무섭게 울려대던 대리점 카톡이 잠잠해졌다. 당일배송율, 사진전송율 등등으로 질타하던 모습이 사라졌다. 일주일 내내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대리점 소장들이 택배노조원들 몫인 분류작업을 위해 아르바이트생들과 현장에 나와 땀 흘리며 일했다. 그동안 택배기사들이 '휠소터(상품자동분류기)'의 분류기능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비할 것을 건의할 때마다 이상 없다더니 이제야 관련업체 직원을 불러 점검시키고 부산을 떨어댄다.
그리고 택배기사들은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 노조원과 비노조원으로 자연스레 나뉘어 버렸다. 오랜 친분이나 가족 같은 인연도 정치색 앞에서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서로 서먹해졌다. 택배노조가 과연 힘없는 택배기사들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줄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 과연 있는걸까.
워낙 방송이나 유튜브 등에서 고수익이라고 떠들어대지만 택배일이란 참 많이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참 편안하게 택배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노조가입여부를 떠나 그들은 이미 주 5일 배송하듯 일하며 남들보다 더 편안하게 일했다. 맘 여린 동료 택배기사들에게 알량한 선심을 베풀고는 자신의 휴일을 위해 자신의 짐들을 한 아름 떠맡기곤 했다.
'내가 싫으면 남도 하기 싫다'라는 생각이 강했던 우리는 곁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볼 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참 경이로웠다. 자기 위주의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그 모습이 어떤 때는 기가 막힐 정도다. <주 7일 배송>이 시작되자 그런 그들이 가장 먼저 뭉쳐서 노조에 가입하며 아침마다 구호를 외쳐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노예 된다."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남의 편안함을 앗아가는 것은 <서로를 갉아먹는 삶> 일뿐이다. 우리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몇 안 되는 택배기사들과 함께 그들의 반대편 택배레일로 자리를 옮겼다.
"왜 전화를 안 하지. 많이 서운하네."
곁에서 까대기 하던 60대 형님이 며느리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부모노릇은 참 힘들다고 했다. 최근에는 손주 생일이라 선물을 사주라며 송금했는데 궁금해서 며느리에게 전화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부재중 메시지가 떴을 텐데 이후에도 전화가 없는 며느리가 몹시도 야속했던 거다.
요즘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베풀었으면 그냥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자신 밖에 모르니 자식이라며 기대감을 접을 수 있어야 오늘을 살아내는 어른이 되는 것인데 그게 그리 힘들다. 찌는 무더위에 택배 하는 엄마아빠 괜찮냐는 안부 전화 한 통화 없는 큰아들 녀석에게 서운함이 생기는 나는 오십을 먹었지만 여전히 아직도 철부지인가 보다.
무엇을 기대하며 우리는 오늘을 사는 걸까.
곁에 다른 대리점의 또 다른 60대 형님이 토요일 오전에 개인적인 일이 있어 오후에 늦게 나온다고 했다. 형님이 없는 오전 까대기시간에 같이 일하던 조카들이 짐들을 대신 받아서 정리했다. 그런데 지켜보니 동별로 정리하는 등 정성 들여 쌓아 놓아서 참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형님에게 말했더니 이런 답변이 되돌아왔다.
"나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 사람은 크든 작든 보상을 꼭 정성껏 해줘야 해."
사람들에게나, 자식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도 않은 채 이러저러한 기대를 가졌던 나는 또다시 철부지가 되었다. 보상을 받으나 못 받으나 부모는 내 부모이고 자식 역시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며 살아온 나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오늘날 시류 속에서 그저 그런 '철부지'로 전락해 버렸다.
이럴때면 나는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던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깊은 심심함'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때때로 철부지를 닮은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우리네 삶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전부고, 자신에 대한 오해가 우리가 하는 생각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인간은 오로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욕망할 뿐"이라는 시몬 드 보브아르의 말처럼, 나는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중심에서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이기심을 따라 휘돌아 치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 그 깊은 심심함 속으로 나를 내맡기려 애쓸 뿐이다. 세상을 벗어나 스스로가 확실히 존재함을 느끼는 순간이면 나는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게 된다. 마치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마을에 들어선 나그네처럼, 느끼는 것과 보는 것 사이를 떠다니며 나는 꿈을 꾼다.
삶 속에는 리듬이 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희미하지만 들려오는 리듬 소리가 있다.
택배가 쏟아지는 요란한 휠소터, 레일 곁에서도,
작렬하는 태양빛과 아파트 화단에서 하늘거리는 나뭇잎과 꽃들 사이에서도,
배송된 상품이 없다며 목청을 높이는 짜증 난 스마트폰 목소리 너머에서도,
그리고 깊고 넓게 패인 청량한 파란 하늘 위로 흘러가는 솜털 구름들에게서도 들려오는 삶의 리듬 소리가 있었다.
희미한 바람소리가,
요란한 매미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한 소금 움켜쥐고 지나친 뒤에 가만히 잦아드는 그 리듬에 온몸을 맡기는 순간, 더 이상 텅 빈 손을 내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즐기고 그렇게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내 영혼을 즐길 뿐 더 이상 묻지도 찾지도 말자. 그저 깊은 심심함 속에 오래도록 내 영혼을 누이고 쉬게 하고 싶다.
삶의 편안함이란 기대를 접고 눈을 감고 깊은 심심함 속으로 나를 내맡긴 채 상상에 빠질 때면 슬며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