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는 곳,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
몇 차례 전화가 왔다. 5년 넘게 연락이 끊긴 지인들이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택배를 시작하면서 내가 살아온 세상 속 모든 인연을 정리한 채 수도권 가장 변두리인 이곳까지 흘러왔다. 지하철 출근 중에 졸다가 우연히 내린 낯설고 한적한 전철역에서 한없이 내려앉는 진한 편안함이 마냥 좋았다. 이렇게 한적하고 적막한 이곳에서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생겨났다.
"모든 것이 사람, 오직 사람뿐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듯하며, 신은 잊히고 인간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그동안 참 많이 지쳐버렸나 보다. 그저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기를 원하는 영혼의 갈증을 쫏아 고요하고 외로운 이곳에 들어와 생활한 지 5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고독은 참 달콤하리라는 속삭임 뒤에는 어쩌면 <완전한 자유>, 바꿔 말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위해 남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여러 소란스러운 만남에서 흩날리거나 다친 깃을 다시 펼칠 수 있는" 상상을 하며 기꺼이 내가 알던 세상을 탈출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의 <해 뜨는 집>이 있다. 그룹 '애니멀스'가 불러 큰 인기를 누린 <house of the rising sun>에서 '해 뜨는 집'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곳', 또는 '다시 시작하는 곳'이란 의미로 표현되었다. 인생의 기나긴 방랑 후에 또 다른 시작을 꿈꾸며 찾아가는 곳. 찬란한 그곳에 들어선 가사 속 주인공은 과연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 곡을 애절하게 부르는 밥집 여주인과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각별한 인연을 키워나간다.
과거의 삶과 단절한 채 도쿄 외곽부 공공화장실에서 그는 매일 속죄와 재생의 의식을 치러내듯 청소하는 삶의 루틴을 번복하며 살아간다. 인상적인 영화의 엔딩장면은 화창한 아침에 출근하는 차 안에서 미소 짓다가 울고, 다시 웃다가 슬퍼하는 히라야마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는 <해 뜨는 집>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히라야마'에게 <해 뜨는 집>은 더럽고 냄새나는 공공화장실이었다. 그리고 택배현장은 나에게 또 다른 시작을 위한 <해 뜨는 집>이다. 그리고 이곳은 통증이 지배했다.
택배는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머리와 눈, 손발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함께 움직여 줘야 온전한 배송이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통증은 그동안 나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던 손가락, 팔다리의 존재를 선명하게 인식시켜 줬다. 고통은 나는 육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시켜 줬다. 남들에게 보이는 삶만큼이나 내가 가진 육체를, 그것이 가진 욕구를 아는 것도 중요했다.
통증이 가시지 않은 채 눈을 뜬 휴일 아침,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과 푸르른 풍경들, 새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내와 함께 늦은 아침과 함께 커피를 나누는 동안 온몸에 흐르는 전율 같은 행복감을, 내 몸이 이런 순간을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책상 위 모니터 속 정보와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몰두하느라 내 몸이 가진 욕구는 철저히 무시하는 것을 당연스레 여기는 세상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음을, 통증이 지배하는 이곳 <해 뜨는 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한 것 같다.
매번 이른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서 택배하고 귀가하면 이곳에는 아내와 나, 아들뿐인 세상이 펼쳐진다. 사람들과 멀어진 이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가족들이 가진 욕구를 이해할 여유로움을 되찿았다. 아내와 아들과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적적한 지루함이나 외로움이 생겨날 즈음이면 좋아하는 음악을 튼다. 그리고 읽던 책 속으로 마저 빠져든다.
사람에게는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 즉 이유를 알지 못해도 삶을 계속해서 지속시키려는 관성적 에너지가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했다.
몸이 느끼는 '충동',
몸과 감정이 빚어내는 '욕망',
정신 속에 새롭게 솟아나는 '의지'
'코나투스'는 이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코나투스는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필요한데 스피노자는 그것을 '역량'이라고 했다. 자신이 지닌 '코나투스'를 온전히 그릇(역량)에 담아낼 때 '편안함(행복감)'이 생겨났다.
나는 삶을 향한 열정을 온전히 담아낼 그릇(역량)을 빚어내는 곳이 <해 뜨는 집>이 아닐까 한다. 비록 외로움과 통증이 지배하지만 캉디드가 권면한 "우리만의 뜰을 경작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라는 생각이, 그렇게 위안스레 다가왔다.
살아가면서 진정한 편안함을 담아내는 그릇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 속 통념과는 달리 금그릇, 은그릇도 아닌 겸허한 '질그릇'일 수도 있겠다. 물고기에게 필요한 것은 높이 나는 날개도, 빨리 뛰는 다리도 아닌 겸손한 지느러미인 것처럼 말이다.
졸다가 지나쳐 내린 한적한 지하철역에서 가만히 내려앉던 그날의 편안함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있는 그대로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려 힘을 뺀 채 바라보는 순간이면 찾아오는 선물, 그것은 삶이 주는 '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