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레일 곁에서.

by 코나페소아

타인과 교류할 때 사람들은 마치 달과 같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오직 한쪽 면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아루투르 쇼펜하우어>


작년 첫 입사 후 연봉협상을 한 큰아들이 며칠간 심란해했다. 원하는 만큼 연봉인상을 못 받은 것보다 겉과 속이 다른 평가에 더 힘들어했다. 입사 후 주변 선배와 상사들이 친절하게 배려해 줘서 너무 좋아했다.


업무적인 부담을 느끼지 말고 천천히 적응하라고 하고선 평가서에 성과가 없다고 적힌 글을 보고 충격을 받고 너무 힘들어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연봉 등 조건이 아니라 사람 속을 아는 것인데 사회초년생인 아들이 이런 속된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참 가슴이 무겁고도 짠해진다. 겉과 속이 다른 세상.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람들은 체면을 지키고 싶어 하며 그 체면에는 감정이 실린다고 말한다. 만남에서 체면이 유지되면 기분 좋고 무시되면 나빠진다. 사람들은 상대에게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체면을 지키려 애를 쓴다. 체면이 망가진 사람은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어막을 치고 달처럼 반대쪽 면만을 보여주며 자신의 체면을 지켜 내려는 것이다.


어빙 고프만은 이런 감추려는 경계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상호존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존중은 관심조차 없고 오직 모멸만이 난무할 뿐이다.




젊은 택배소장이 잠시 커피 한잔을 하자고 했다. 깊은 고민 끝에 말하는 건데 형님이랑 더 오래 하면 갈등이 커질 것 같다. 이만 아름다운 이별을 했으면 한다라는 말을 건넸다.


해고를 통보하는 것이었다. 신생대리점에서 최고참 기사이면서 가장 높은 배송실적을 기록하고 있어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름 생각해 보니 소장이 왜 그러는지 짚이는 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대리점의 소장은 개인사업자인 택배기사와 개별계약을 통해서 갑의 위치에 서 있다. 갑의 신분을 활용해서 대리점 기강을 잡는데 가장 크게 사용하는 것이 해고를 무기 삼아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대리점 선임으로서 나름 책임감을 느끼고 잦은 해고에 입바른 소리를 한 것과 소장이 내세운 어설픈 팀장을 존중 안 한다는 것이 아마도 젊은 소장에게 많이 거슬렸나 보다. 평소 나를 존중하지 않는 곳에는 있지 않겠다는 몹쓸 소신에 따라 일방적인 '아름다운 이별'을 수용하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게 또 괘씸했는지 보증금 30만 원을 이런저런 핑계로 지급하지 않았다. 보증금은 기사가 퇴직 시 3개월 동안 미지급하는 금액이다. 기사가 퇴직 후 발생되는 상품클레임에 따른 손해배상 때문인데 이것을 이 젊은 소장이 악용해서 택배기사인 나에게 부담 지워도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리더십이 뭔지도 모르는 소장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해고의 두려움을 이용한 구속일 뿐이다. 택배회사의 뿌리 깊은 고용시스템에는 상호 존중은 없고 오직 갑의 존중만이 존재함을 강조할 뿐이다.

특수고용노동자인 택배기사는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인권사각지대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택배현장은 모든 상황에 대해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그나마 조금 남은 체면이라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금융치료>를 위안 삼아 힘든 현실을 견뎌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름답지 못한 '아름다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그동안 배송했던 구역과의 마지막 배송 때문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아무 생각 없이 바쁘게 오가던 구역이었는데 그날은 정말 다르게 와닿았다.


경사가 40도 이상 되어 늘 쌓아둔 탑차의 짐이 무너지곤 해 멘붕을 불러왔던 00 산업 고갯길,

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 저녁 늦게까지 우리 부부가 배송할 때 지하주차장까지 따라내려와서 김치부침개를 전해주시던 엄마 같던 임대주택 102동 할머니, 바쁘게 상품을 정리 중인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참 열심히 사는 부부라고 늘 아들과 칭찬하며 지켜본다고 말을 건네던 저녁 7시면 꼭 나와 운동하시던 00 아파트 부녀회장님, 늘 배송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반품상품을 내놓을 때마다 그 위에 조그만 선물을 두시던 1203호 사장님, 택배초기 2년간 참 많은 정이 들었구나 하고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고 마지막 배송이라 생각하니 참 많이 아쉽고 서운했다.


예상치 못한 이런 감정적 상황에서 문득 갑자기 기요메 선배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다.

생 택쥐페리가 쓴 <우연한 여행자(원제: wind, sand and stars)>에서 우편항공기를 모는 초보비행사에게 선배 비행사가 지형을 익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날 선배 기요메에게서 배운 지리학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기요메는 내게 스페인의 지리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스페인을 친구처럼 친근한 감정을 갖도록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가딕스 지방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 근처 밭에 우뚝 서 있는 세 그루의 오렌지나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또 콜라시의 지형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곳의 농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집의 주인과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초보비행사처럼 나도 기요메선배가 가르쳐준 지리학의 의미를 몰랐다. 뒤늦게 그것이 그곳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가르쳤구나를 깨달았다. 내가 가고자 하는 그곳이 품고 있는 세 그루의 오렌지나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안다는 것은 그곳의 실체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존중은 곧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다. 오랫동안 일한 베테랑 택배기사들은 배송하던 구역의 아기들이 자라서 성인이 돼서 인사하더라는 사연들을 품고 있다. 아름다운 이별 없이 나도 내가 배송하는 구역의 사람들을 품고 배송하는 택배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택배대리점 소장과의 갈등으로 새로운 택배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당시 택배기사는 실업급여 대상자도 아니었고 여유자금도 없어 수입의 빈공백을 빨리 메워야 했다. 인생의 또 다른 절벽 위에 선 느낌이었다. 마침 배송하던 구역에서 오가며 친해진 C택배사 부부가 우리 처지를 알게 되어 자기네 센타로 까대기알바를 해보는 건 어떤지 제안을 해왔다. 알바로 근무하다가 C택배사 자리가 나면 입사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출근하기로 했다.


한 달 반을 까대기와 배송지원알바를 하며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리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현실만 깨달았다. 국내 최대택배회사인 만큼 지원자가 너무 많아 새로운 자리가 언제 생길지 기약이 없어 보였다.


내 배송구역이 아닌 남의 구역을 알바로 배송지원만 하는 처지가 우리를 점점 더 지치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당시 알바로 쓰던 기사들도 우리를 걱정해 주던 처음보다 시간이 갈수록 저렴하게 백업기사처럼 활용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점점 우울해졌다.


애마 포리가 화물칸이 덩그러니 비어있는 상태로 서있는 모습이 크게 눈에 와닿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마음에 결심을 했다. 이곳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고 즉시 다른 택배사를 알아보기로 했다. 인생은 풀리는 순간은 풀리게 되어 있다. 마침 내가 근무했던 택배사의 O지점에서 모집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후 출근하고 보니 배송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가까운 곳이었고 대리점 동료들 분위기도 온순하고 여유로워 여로모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두려움을 넘어 벼랑 끝에 다가간다는 의미는 바로 내가 내 삶에 대한 결정권과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적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멈춰 선 택배레일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참 배송하던 중간에 급한 연락이 왔다. 입원하셨던 장인어른이 오늘밤을 넘기시기 힘드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아내는 나를 두고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는 아빠에게는 죄송했지만 병원과 장례식장에서 온통 내 걱정으로 마음이 심란했다고 한다.


아내도 아내지만 혼자서 배송일을 마무리해야 했던 나도 정신없이 배송했는지 오배송이 생겨났다. 장례식 등 급한 경조사에 쉽게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게 택배기사다. 대리점에서 다른 동료기사들에게 부탁해서 배송을 분담할 수도 있지만 다들 힘들게 배송하는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부탁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든 거다. 처지를 알기에 가급적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할 수밖에 없다. 급한 장례식에도 쉽게 갈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이 택배기사의 매여사는 처지가 실감되면서 참 고통스러우면서 회의가 생겨난다. 언젠가 tv에서 왕년의 청춘스타 얄개 이승현 씨가 재혼 후 부부가 파전가게를 하며 사는 일상을 방송했다. 그때 처형의 급작스런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사전에 예약했던 단골손님들의 항의전화에 부부가 상의해서 다시 올라와 예약손님을 치르고 다시 장례식으로 향하던 장면을 보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왜 이리도 인생을 구차하게 만드는 건지 이렇게까지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구차한 상황들이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수감자들은 모든 것을 거부한 채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말한다.


힘겨운 순간들을 뒤로하고 택배박스를 토해내는 레일 앞에 다시 섰다.

아무런 치장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지만 레일이 돌아갈 때면 알 수 없는 생기가 휘감아 돈다. 활기가 생겨난다.


H 형님이 슬며시 흰 조의봉투를 내밀며 힘내라고 다독인다. 아들뻘되지만 형님이라고 깍듯하게 호칭하는 막내 S도 멋쩍은 듯 조의봉투를 건네고는 자기 자리로 총총히 사라진다.

오늘도 택배기사는 돌아치는 질긴 속박 같은 레일 곁에서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선택하며 다시 선다.

인생이 준 최고의, 최후의 선물은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런 자유를 잃지 않고 살아낼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결코 구차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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