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만 하는 이야기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글 읽고 쓰는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우울증을 앓아왔다. 우울에 대한 글을 꼭 써내야 할까? 망설이던 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글이라 생각해서 용기를 내본다.
나는 애초에 친구가 많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친구들은 늘 적었는데, 그런 주제에 별로 관계가 깊지도 않아 난 항상 조금 외로웠다. 그러나 친구가 많아 산만한 것보다는 외로운 게 나았기에 굳이 더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처음에 난 보통의 내향인이 그렇듯 집에만 칩거하는 생활을 기껍게 여겼다. 그런데 그 기간이 한 달, 두 달... 1년 남짓 지속되자 해안가에 파도가 쳐 물결이 일듯이 서서히 내 마음 안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중학교 때의 엄마는 극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엄마는 자식인 내게 그것을 티 내려 하지 않았지만 당시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좁은 집에 매일을 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고, 어린 나는 눈치가 빠르고 공감능력이 뛰어났다. 엄마의 우울과 무기력함은 나에게 연기처럼 서서히 전파되었다.
모르겠다. 그때에 우리 가족은 모두 우울했다. 고등학생이었던 언니는 학업스트레스로 우울했고,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빠도 우울했다.
우울한 집. 매일 공황을 겪는 엄마. 초등학교를 졸업해 모든 친구와 교류가 끊기고 코로나의 여파로 체중이 급격히 증가한 나. 늘 기저에 깔려있는 고독과 외로움. 때마침의 사춘기. 우울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좁은 내 방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살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방 밖의 엄마는 언젠가는 친절했다가 언젠가는 몹시 짜증을 냈다. 내 사소한 잘못으로 체벌을 한 적도 있었다. 아팠다. 난 엄마를 피해 방 안으로 틀어박혀 인터넷과 소설에 빠졌다.
유독 중학교 때의 기억은 듬성듬성 있다. 기억 속의 나는 주로 손목자해를 했다. 처음엔 손톱으로 가려운 부분을 긁듯이 했다. 그다음엔 자와 같이 딱딱한 물체로 했다. 그러다 문득 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커터칼로 했다. 초등학교 종이접기 시간에 필요하다고 샀던 커터칼이었다. 피를 보면 속이 후련했다. 흉터에 대한 두려움이 문득 덮쳐와 손목 사진을 찍어 지식인에 올리기도 했는데 내 네이버 아이디로 가족이 볼까 봐 삭제했다. 자해를 끝마친 후엔 내 방 창문을 열고 그 아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난 그 좁은 방 안에서 차츰차츰 죽어가고 있었다.
코로나가 얼추 끝나고 고등학교를 올라갈 시기가 당도했다. 난 드디어 그 방을 탈출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또래와 교류를 했다. 학기 초에는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반드시 겪는 것. 입시와 학업스트레스. 난 강남 8학군의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때부터 나에게 진정한 고난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에게, 우리에게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내신을 따고 훌륭한 대학에 가야 한다고 속삭였다. 한 번의 실수에 한 등급 하락. 한 번의 찍맞에 한 등급 상승. 그 묘한 간극은 우리를 미치게 했다. 이제 친구들은 더 이상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의 경쟁자였다. 4%, 1등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밟고 올라서야 할.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암흑이었다. 내 우울증은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지진 않았다. 그래도 이젠 학교를 다니니까 주변 사람을 의식해서 자해는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은 더 깊이 곪아갔다.
나와 성적대가 비슷한 아이가 있었는데 나를 오묘하게 괴롭혔다. 그래놓고 내가 뭐라 하려고 하면 미안해~라며 곧장 사과를 하고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다. 내게 수학문제를 풀어달라는 것이 그애의 흔한 수법이었는데 내가 문제를 풀지 못하면 '그럼, 역시 네가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흡족하게 물러났고 내가 문제를 풀어내면 그날 하루 종일 내게 짜증을 냈다. 내 문제집을 난데없이 뺏은 적도 있었고, 그애는 그걸 장난이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날 은근히 무시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서술형 채점 체크를 했는데 형평성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출제 오류를 찾아낸 적도 있었는데 교사는 그것을 분명히 인지했지만 복수정답은 안된다고 했다. 그런 적이 수차례. 더군다나 그러한 항의를 하려면 교탁 바로 앞에서 해야 하는데 그럴 때면 수많은 시선이 나를 쏘아봤다. 복수정답 또는 오답 처리가 되면 불리한 학생들, 혹은 점수가 깎여 교사에 대항하는 학생1을 바라보며 흥미진진해하는 학생들. 숨이 막혔다. 나중 가서는 난 아무리 옳은 말로 항의를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을 깨닫고 잠자코 확인란에 싸인을 했다. 그러면 교사들은 나를 좋게 봐줬다.
학생부종합이라는 전형으로 대학을 가려면 성적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활기록부, 통칭 생기부에 교사가 적는 말 또한 매우 중요했다. 상위권 애들은 생기부의 원리를 깨닫고 일찌감치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다. 선생님 예뻐요, 선생님 좋아요! 이런 말에 교사들은 생기부를 신경 써서 써줬다. 물론 최상위권 애들에게는 그런 걸 안 해도 지어내서라도 써줬다. 그런데 애매한 상위권에 한평생 아부를 해본 적 없는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난 친한 선생님 한 분도 없었고, 내가 논문까지 참고해서 쓴 리포트는 피곤과 무기력에 찌든 교사들에게 그저 쓸데없이 알아보기 어렵게 쓴 종이쪼가리였다. 그 리포트는 결국 생기부에 제목과 첫 줄만 적혔다.
학교가 끝나면 난 내신학원으로 갔다. 내가 다니는 학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친한 엄마들이 결성한 소형 팀수업, 그리고 하나는 학교 애들 대부분이 한꺼번에 다니는 대형 학원.
팀수업에는 나와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실 거기에서는 공부는 별로 안 하고 놀았던 것 같다. 친한 애들을 뭉쳐놓으면 공부가 될 리가.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그 팀수업에서 어울리던 친한 친구에게만 말해준 내 성적을 친구의 엄마가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 하면, 우리 엄마와 친구 엄마가 통화를 했는데 그 엄마가 내 성적을 거론하면서 "ㅇㅇ이 언니는 공부 잘했는데, ㅇㅇ이 때문에 고생하겠네~ ㅇㅇ이 엄마는 고생도 좀 해봐야지 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난 그 팀수업에서 겉으로만 웃으며 친구들을 대할 뿐 그 애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내 성적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는, 다시는 하지 않았다.
대형 내신학원도 나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매일 시험을 봤는데, 시험을 보고 나면 학원에서는 가장 우수한 점수를 받은 애들과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애들을 대자보에 적어 붙여놨다. 공개처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공부를 해가야 했다. 그리고 학기 말에는 1등급 받은 애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장학금을 줬다.
대형 내신학원 조교들은 그 강사가 가르친 고등학교 출신 명문대생들이었는데, 수업 시작 전에 강사는 그들을 트로피마냥 하나하나 소개했다. 그 조교들은 내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해주지도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의 역할은 트로피로서 그저 같은 고등학교 출신 후배들을 꾀어내 그 학원을 등록하게 하는 데 있었으니.
내 기억에 최악으로 남았던 대형학원강사는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여전히 광고 전광판을 독점하고 있다. 나는 매번 그 광고를 역겨움을 참으며 지나간다.
고3 2학기, 모든 내신과 관련한 일이 끝나고 수능공부에만 전념하는 시기에는 난 오히려 괜찮았다. 적어도 같은 학교 친구들과는 경쟁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래도 모의고사 한 번, 사설시험 한 번에 가슴이 철렁하고 수시로 우울했다 나아졌다 기분이 널뛰기하는 건 여전했다. 무자비한 수능학원 비용도 우리집에 부담이었다. 부모님은 한숨이 늘었다. 난 어느 때보다도 강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고, 내 2026학년도 입시는 끝이 났다. 총 2.0이라는 내신. 그리고 수시 6광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정시, 문과로 교차해서 대학을 갔다. 그리고 난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남은 것 없이.
코로나, 가족의 우울, 선천적인 기질, 대한민국의 입시구조, 학벌주의... 이 모든 것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우울증을 앓았던 아이는 그대로 커서 올해 성인을 맞이했다. 입시가 끝나고 대학을 등록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던 '대학만 가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도대체 뭐였던 건가? 난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들은 이제 입시를 시작하는 어린애들의 머릿속에 똑같은 세뇌를 심어놓겠지. 그리고 그애들은 나와 똑같은 경쟁을 시작할 거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올해 재수를 한다. '끝내 학벌주의를 버리지 못했구나', '그들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라고 한다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난 1년 더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명확한 목표는 없지만 나를 올해 대학에 가게 해준 수능을 한 번 더 믿어보려고 한다.
난 현실도피자가 맞다. 내가 앞서 말한 모든 과정 속에서 난 틈틈이 판타지소설을 읽고 공상을 했다. 우울감이 덮쳐오면 글도 썼다. 근데 현실도피자면 뭐 어때? 내가 읽는 그 소설조차 결국 현실의 산물 아닌가? 난 말로는 현실도피자이지만 끝내 현실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를 이끌어, 이세계 이동을 희망하던 나는 이제 그런 내용의 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가 되었다.
나는 아직 우울과 싸우고 있다. 사실 재수 기간 동안 내가 내면의 무기력과 우울과 싸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한다. 지금도 종종 아침에 일어나면 죽고 싶으니까. 힘들 때면 글을 쓰겠다. 그 글들은 파랗겠지. 그리고 파란 글들을 토해내고 모으다 보면 노랗고 빛나는 글들도 내게 올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