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밥 없이는 못사는 여자
"민법, 형법, 상법, 헌법, 행정법..."
칠판 위로 분필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글자들이 줄줄이 적혀갔다. 숫자보다 글자를 더 두려워하던 주부 김미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법'이라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뒷면의 작은 글씨나 남편 자동차 보험 약관 정도만 접해본 그녀였다. 그런데 어쩌다 동네 주민센터 평생교육 강좌에서 '알아두면 쓸데 있는 생활법률'을 듣게 된 것이다.
법이란 단어만 들어도 괜히 기가 눌렸던 그녀였다. 법은 판사나 검사 같은 분들만 아는, 전문용어로 가득한 먼 세계라고 여겼다. 하지만 수업 첫날부터 그 고정관념이 산산조각 났다. 강사가 예상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여러분, 민법 제1조가 뭔지 아십니까? 모르셔도 괜찮아요. 제가 쉽게 알려드립니다. 민법 제1조! '법률은 명령이다!' 아니에요~ '법원은 뭐다?' 바로바로, 법률, 관습법, 조리!"
분필을 든 교수는 마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처럼 열정적으로 칠판에 적고 말하고 또 적었다. 김학수 교수라고 소개한 그는 60년생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미정은 처음엔 '그 나이에 요즘 감각을 따라올까' 싶었지만, 그런 걱정은 10분 만에 사라졌다. 설명이 맛깔난 데다 웃기기까지 했다.
"법은 생활과 멀리 떨어진 게 아닙니다! 이혼이나 재산분할 때만 쓰는 게 아니에요. 시장에서 귤 한 봉지 사는 것도 계약이고, 아침에 문 열고 나오는 것도 거주이전의 자유입니다!"
이쯤 되자 미정은 '이 강의는 뭔가 다르다'라고 느꼈다. 2시간이 20분처럼 훌쩍 지나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수업 중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교수가 강의실 스크린을 올리려다 애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거 또 안 올라가네. 이래서 내가 전자기기를 못 믿는다니까요. 누가 좀 도와주실래요?"
학생 몇 명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직원이 허둥지둥 뛰어와 리모컨을 눌렀다. 삐—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올라가고 칠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분필을 들었다.
"됐습니다! 다시 출발해 봅시다. 아, 우리 직원분께 박수 한 번 주세요!"
그날 수업이 끝나고 미정은 노트를 덮으며 혼잣말했다.
"법이란 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구나."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너무 딱딱하고 엉성한 부분도 많잖아? 현실과 어긋나는 것도 많고."
교수는 수업 중간중간 실제 사례를 많이 들려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옥소리 사건'이었다. 교수가 칠판에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고 적으며 설명했다.
"여러분, 연예인 옥소리 기억하시죠? 남편에게 간통죄로 고소당했을 때 이분이 뭐라고 했느냐면, '왜 내 사생활을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느냐'며 헌법소원을 냈어요. 당시엔 기각됐지만, 그게 나중에 간통죄 폐지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아도 억울했겠다. 정말 법이 삶과 동떨어진 구석이 많네.'
또 다른 날, 교수가 칠판에 '전효숙'이라는 이름을 크게 적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이분이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소장이 될 뻔했어요. 그런데 야당 반대로 인준이 지연되면서 결국 사퇴했죠. 여성이라는 이유,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로 발목이 잡힌 겁니다. 법적으론 아무 문제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날 이후 미정의 수업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렇게 김미정은 '그냥 재미 삼아' 시작한 수업에서 천천히 '법'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싶었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던 세계의 문을 비로소 열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