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책을 나눈다는건 맛있는 케익을 함께 먹는 행복에 고독하지 않다
보후밀 흐라발의 주인공 한탸처럼, 우리도 무언가를 압축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압축하는 것은 폐지가 아니라 인간 자체다.
점점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더 많은 것을 압축해서 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압축기 안에 있었다는 것을.
AI가 우리 삶에 몰려올 때마다 들려오는 말들이 있다.
"생산성을 높이세요."
"효율을 극대화하세요."
"이 업무는 AI가 더 잘합니다."
마치 한탸가 목격한 현대식 압축기처럼, 광대한 시설에서 유니폼을 입은 기계들이 우리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나?
우리 시대는 시끄럽다
너무도 시끄럽다.
매일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고, 매일 새로운 일자리가 사라진다.
라디오에서는 AI 혁명을 외치고, SNS에서는 "뒤처지지 말고 빨리 적응하세요"라고 외친다.
그 소음 속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엄청나게 고독하다.
왜냐하면 "생산적이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목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ChatGPT는 1초 만에 글을 쓴다.
당신이 한 시간 들여 작성한 보고서는 이제 예술이 아니라 낭비다.
알파고는 바둑의 신수를 찾아낸다.
당신이 30년 연구한 정석은 이제 구식이다.
이미지 생성 AI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자리를 빼앗는다.
당신의 손으로 그린 그림은 이제 "효율이 떨어진다."
한탸가 지하실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본다.
광대한 데이터센터에 줄지어 앉은 AI들의 모습을 본다.
그들은 실수를 하지 않고, 피로를 모르고, 급여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한탸처럼 끝나가는 세계의 종말을 목격하는 사람이라는 걸.
하지만 세상은 정확히 이분법적이지 않다.
국립 도서관의 사서는 여전히 책을 분류한다.
컴퓨터가 더 빨리 하지만, 그녀는 손으로 책을 넘기며 "누가 이 책을 필요로 할까"를 생각한다.
이것은 비생산적이다.
효율성으로 따지면 낙제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한다.
장인 목수는 여전히 목재를 깎는다.
그의 손가락은 결 위를 따라 움직이고, 그는 "이 나무가 원래 뭐였을까"를 생각하며 깎는다.
3D 프린터가 더 정확하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비경제적이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한다.
시골 할머니는 여전히 손으로 메주를 쑨다.
손으로 된장을 담근다.
식품 공장의 기계가 천 배 빠르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움직인다.
이것은 생산성 측면에서 완전히 불합리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기계가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손맛이다.
정성이다.
사랑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온기다.
기계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다.
만약 현대의 AI가 한탸에게 물었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선생님, 그 책들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는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저는 초 단위로 그 모든 책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하실에서 35년을 허비한 것은 왜입니까?"
그러면 한탸는 뭐라고 답했을까.
"음, 그건 말이야... 내가 책을 읽으면서 바퀴벌레들을 관찰하고, 만차를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했어.
그 시간들이 나를 인간으로 만들었어."
AI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비생산적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AI는 완벽히 들어주지만, 뭔가 다르다.)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것. (메일보다 느리지만, 마음이 다르다.)
밤하늘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낭비지만, 필요하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리는 것. (배달 앱이 빠르지만, 손으로 해야 다르다.)
시를 읽고 눈물 흘리는 것.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이다.)
한 권의 책을 몇 달 동안 천천히 읽는 것. (스킴이 빠르지만, 마음이 남겨진다.)
아이와 함께 블록을 쌓는 것. (어떤 교육 프로그램도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AI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시끄럽다.
자신의 무용함을 설득하려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너무도 시끄럽다.
문제는 이것이다. 한탸가 현대식 압축기를 본 후 깨닫게 되는 것.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인정이다.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AI를 이길 수 없다.
속도에서도, 정확도에서도, 효율성에서도 우리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다른 길을 본다.
우리는 AI와 경쟁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탸는 결국 자신의 압축기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것은 죽음이다.
또는 항복이다.
또는 절망이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그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느낀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산성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쓸모없음의 재발견이다.
집에서 명상하는 사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들
책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
밤하늘을 보는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은 통계상 비생산적이다.
경제학적으로 쓸모없다.
그런데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AI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일은 이것이다.
비생산적으로 살기. 효율을 거부하기. 쓸모를 포기하기.
한탸처럼, 우리도 지하실에 있을 수 있다
어둡고 낡은 곳에서. 그곳에서 우리는 AI가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외로워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인간인 이유다.
너무 시끄러운 발전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찾는다.
아무도 우리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인간으로서.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살았다."
나는 작가다.
그 누구도 내 책을 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쓴다.
왜냐하면 내가 쓰는 행위 자체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느낀다.
내 손은 움직이고, 내 가슴은 뛴다.
한탸처럼, 우리도 지하실에 있을 수 있다.
어둡고 낡은 곳에서.
그곳에서 우리는 AI가 절대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외로워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인간인 이유다.
너무 시끄러운 발전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찾는다.
아무도 우리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는 자리에서.
인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