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면 옷이 넘쳐나는데 입을 게 없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살이 조금... 아니, 전략적으로 쪄버린 나는 오늘도 옷장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서울공예박물관.
SNS에 드레스 인증숏이 자꾸 올라오는 걸 보면서 "나도 가야지 나도 가야지"를 무한반복하다가 드디어 발동이 걸렸다. 미룸의 달인인 내가 움직였다는 건 그 드레스 사진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뜻이다.
도착하자마자 정보를 입수했다. 3시 30분에 도슨트가 있다고. 서둘러 인포데스크로 달려가 "지금 조금 늦었는데 도슨트 어디 계세요?" 하고 물었더니 손님이 없어서인지 직원분이 "잠시만요~" 하더니 도슨트 선생님을 직접 불러주셨다.
그런데.
도슨트가 시작되자마자 들려오는 언어는... 영어였다.
'아, 나 혼자니까 한국말로 해주시겠죠?'라는 나의 기대와 달리, 선생님은 영어가 더 편하시다고 하셨다.
영어 전문 도슨트이셨던 것.
그렇게 나의 생애 첫 영어 듣기 평가 도슨트 투어가 시작되었다.
일상생활영어라면 눈치와 코치로 어떻게든 캐치하는데, 문제는 나전칠기였다.
나전칠기... 한국어로 들어도 어렵고 낯선 단어인데, 그걸 영어로 듣고 있으니 나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
옆에 붙어있는 한국어 설명판을 정신없이 커닝하며 도슨트 선생님 뒤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중간중간 한국어로도 설명해 주시는 친절함에 눈물이 날 뻔했다.
용감하게 질문도 했다.
상 옆에 있는 물건이 뭔지 여쭤봤더니, 선생님도 잠깐 설명판을 확인하시고는 "팔걸이요"라고 알려주셨다. 우린 같이 공부했다.
그래도 나전칠기 장인의 손길이 얼마나 반복되고 정성스러운 작업인지는 느껴졌다.
언어를 초월하는 감동이 있었달까.
유럽에서는 요즘 자개 가구가 유행이라, 할머니 장롱이라고 버리려던 걸 문짝만 떼어 테이블로 만들기도 하고, 나중에 가치가 오를 수 있으니 잘 보관하라고. 인스타에 글을 본 적이 있다
옛날 우리 집에도 자개장롱이며 문갑이 있었는데... 왜 버렸을까.
서양에서 우리 것을 알아봐 주는 게 왠지 뿌듯하고 묘하게 억울하다.
그리고 드디어. 드레스 전시실 입장.
입구부터 드레스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와이어, 구슬, 노방, 폐소재로 만든 옷들인데 대형 공간 설치 작품처럼 압도적이다.
디스플레이도 너무 잘해놔서 더 멋있어 보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
"나도 살 빼면 저런 거 입어야지."
... 이 생각, 옷장 앞에서도 매일 하는 생각인데?
옷장에는 입을 수 없는 옷이 가득하고, 전시장에는 입을 수 없는 작품이 가득하고.
나와 공예박물관은 통하는 게 있었다.
둘 다 입을 수 없는 옷을 전시하고 있으니까.
차이가 있다면 박물관 건 작품이고, 내 옷장 건... 희망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전시회 열어볼까. 제목은 "입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장소:안방 옷장 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