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대 대통령선거 투표관리관의 15시간 -
새벽 4시 30분, 알람이 울렸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나는 아침이었다. 제21대 대통령선거 당일,
나는 동탄*동 제1투표소의 투표관리관이었다.
4년째 하는 선거 아르바이트지만, 여전히 긴장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50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교정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총 13명의 선거 사무원들 - 선거인명부 확인 2명, 투표용지 교부 2명, 투표함 관리 1명, 투표참관석 6명, 그리고 나를 포함한 등재번호 안내 2명.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4년 차 경험이 있다 보니 다른 사무원들보다는 수월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투표 시작 10분 전인 5시 50분, 벌써 교문 앞에 줄이 서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외출복을 걸친 아주머니, 러닝복 차림의 중년 남성,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사람 사전투표 제도가 도입된 이후로 당일 투표자 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시민들의 의지는 뜨거웠다.
"6시 되면 바로 시작합니다!"
내가 큰 소리로 안내했다.
"똑, 똑, 똑..."
시계 초침이 6시를 가리키는 순간, 첫 번째 유권자가 들어왔다. 7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보조기구 없이는 걷기 힘들어 보이셨지만, 눈빛만은 또렷했다.
"등재번호 확인해 드릴게요."
내 역할은 등재번호 안내였다. 유권자들이 가져온 선거인등재번호를 확인하고, 올바른 투표 절차를 안내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4년간의 경험으로 어떤 실수들이 자주 발생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오전이 지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먼저 투표하고 나와서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동안, 어머니가 투표하는 모습.
아이들에게는 살아있는 민주주의 교육의 현장이었다.
" 여기가 맞나요?"
중년의 여성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선거인등재번호를 확인해 보니 다른 투표소였다.
"죄송하지만 **동 **투표소로 가셔야 해요.
여기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입니다."
하루 종일 이런 일이 반복됐다. 전체 유권자의 7% 정도가 잘못된 투표소를 찾아왔다.
이사를 했거나, 선거구가 바뀌었거나, 단순히 착각한 경우들이었다.
처음에는 안타까웠지만, 이제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정말 다양한 실수들이 있었다.
"어? 제 신분증이..."
기표소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당황했다. 기표소 안에 신분증을 놓고 나온 것이다.
매년 몇 번씩 반복되는 일이었다. 신분증, 지갑, 분실물이 생긴다
꼼꼼하게 선거인 등재번호 용지를 잘라서 가져오신 분도 있었다.
"천천히 하세요. 급할 것 없어요."
더 당황스러운 경우들도 있었다.
"모바일 신분증 있는데요?"
젊은 남성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런데 화면을 확인해 보니 유효기간이 지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만료된 신분증은 사용할 수 없어요. 집에 가서 실물 신분증을 가져와 주세요."
그분은 한숨을 쉬며 돌아가셨다.
"어머... 신분증을 깜박했네요."
오후 늦게 온 중년 여성이 가방을 뒤지더니 당황했다.
"집이 멀어요?"
"차로 20분 정도요..."
"시간은 8시까지니까 다녀올 수 있어요. 천천히 가세요."
이런 일들이 매번 몇 번씩 반복됐다.
투표 의지는 있지만 준비가 미흡한 경우들이었다. 4년 전 처음 할 때는 이런 상황들이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차분히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오후가 되자 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몸이 불편한 분들의 투표 의지였다.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목발을 짚고 오신 분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힘들어하시자 다른 사무원과 함께 도와드렸다.
"괜찮으시겠어요? 천천히 하세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 일로 투표를 포기할 수는 없죠."
그분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환자복을 입고 보호자와 함께 오신 분도 있었다. 아마 병원에서 잠시 나오신 것 같았다. 휠체어를 타고 오신 분, 보행기를 끌고 천천히 걸어오신 어르신... 모든 분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숭고해 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강아지를 안고 오신 할머니였다.
"강아지는 밖에서 기다려야 해요."
"어머, 그럼 누가 봐줘요?
할머니의 난처한 상황을 본 투표참관인 중 한 분이 나서주셨다.
"제가 잠시 봐드릴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금방 할게요."
그런 작은 배려들이 모여서 선거가 원활히 진행되는 것이었다.
투표참관석에 앉은 6명의 참관인들은 정말 지루해했다.
6시에서 12시까지, 그리고 12시에서 6시까지 교대로 6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서
투표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다.
젊은 참관인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나이 드신 분들은 졸음과 싸우고 계셨다.
"참관인 분들도 힘드시죠?"
점심시간에 한 분이 하신 말씀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이렇게 힘든데, 계속 서서 일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힘드실까요."
그래도 참관인들의 존재 자체가 선거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점심시간은 교대로 30분씩이었다. 미리 주문한 도시락을 후다닥 먹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했다.
15시간 근무에 30분 점심시간.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 있었다.
가족 단위 투표자들도 많았다. 러닝복 차림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투표 후 운동하러 가는 계획인 듯했다. 나들이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오신 가족들도 있었다.
"투표 끝나면 어디 가세요?"
"놀이공원 가기로 했어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지난번 선거보다는 확실히 한산했다.
사전투표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투표를 마친 상태였다.
"사전투표 하신 분들이 많아서 다행이네요."
동료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당일 투표를 고집하는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후 5시쯤, 동료 사무원이 내게 다가왔다.
"많이 해보셨죠? 일을 참 잘하세요."
순간 가슴이 따뜻해졌다. 4년 차 선거 아르바이트라는 경험이 이런 식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이번이 네 번째였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웠는데, 이제는 유권자들이 어떤 실수를 하실지, 어떤 도움이 필요하실지 미리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작은 칭찬 덕분에 남은 3시간이 더욱 기분 좋게 흘러갔다. 더 친절하게 응대하게 되고,
더 세심하게 안내하게 되었다.
"투표 마감이 오후 8시입니다!"
계속 안내했지만, 7시 50분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표 마감입니다!"
오후 8시 정각, 긴 하루가 끝났다.
15시간의 대장정이었다.
투표함을 봉인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투표소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일까지. 모든 과정이 정해진 절차대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흰 봉투에 담긴 일급을 받으며 생각했다.
일의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장시간 근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방전시키는구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화성특례시]
안녕하십니까? 화성특례시입니다.
제21대 대통령선거 투표사무에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러분께서 보여주신 책임감과 성실함, 그리고 시민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 덕분에 이번 선거가 공정하고 원활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신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열정이 우리 화성특례시의 자랑입니다. 앞으로도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성특례시 드림
문자를 읽는 순간,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시민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 그래, 바로 그거였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것이.
다리에 깁스를 하고도 투표하러 오신 분, 환자복을 입고 보호자와 함께 오신 분, 강아지를 안고 와서 고민하시던 할머니, 모바일 신분증이 만료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신 청년, 신분증을 깜박해서 20분 거리를 왕복하신 아주머니, 잘못된 투표소를 찾아와서 다시 길을 떠나신 7%의 시민들...
그 모든 분들이 소중했다. 그리고 그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감사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4년 차 선거 아르바이트. 시급으로 따지면 그리 큰돈이 아니다.
15시간 서서 일하고, 30분 점심시간에 후다닥 도시락을 먹고, 화장실 갈 시간도 빠듯한 하루.
그런데 왜 또 하게 될까?
동료가 "일을 참 잘하세요"라고 말했을 때의 그 기분, 시민들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을 때의 그 순간, 화성특례시에서 보내온 감사 문자를 받았을 때의 그 뿌듯함.
아, 이거구나.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작은 부품이 되어보는 경험,
시민들의 소중한 한 표가 제대로 행사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완벽하지 않은 민주주의.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신분증을 깜박해도 다시 가져오고,
투표소를 잘못 찾아와도 다시 찾아가고,
몸이 불편해도 투표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내일부터 새로운 대통령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에 내가 작은 역할을 했다.
흰 봉투 속 일급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건 단순한 아르바이트비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대가였다.
내일을 위해 재충전해야지. 4년 후, 또 다른 선거가 오면... 아마 또 지원하게 될 것 같다.
그때도 누군가 "일을 참 잘하세요"라고 말해줄까? 그때도 감사 문자가 올까?
그런 작은 기대를 품고 잠들었다.
새벽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방전된 하루였지만 충만한 하루이기도 했다. 15시간의 긴 여정 동안 만난 모든 시민들, 함께 일한 동료들, 그리고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느낀 모든 감정들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4년 차 선거 아르바이트,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