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해야 했나요

데이미언 허스트 전을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후회했다.

아니, 정확히는 전시실 첫 번째 작품 앞에서 멈춰 섰을 때였다.

포름알데히드 수조 안에 동물이 잠겨 있었다.

죽어서, 보존되어서, 전시되어서. 살아 있는 것처럼 형태를 유지한 채로.

나는 그것을 보며 한 가지 질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요?

데이미언 허스트는 영국의 시각미술가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이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오늘 전시장에 오기 전까지 그를 제대로 몰랐다.

그저 "동물을 포름알데히드에 담그는 사람"이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러 왔다가, 나는 소문이 오히려 순화된 버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사› 연작. 죽은 동물들이 투명한 수조 안에 담겨 있다.

커다란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선명하게 정지해 있다.

썩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그렇다고 살아 있지도 않다.

그 이상한 중간 어딘가에 놓인 존재를 나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불편했다. 그런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원래 아름다운 것을 두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자라면서 그렇게 배웠다.

잘 그린 그림, 정교한 조각,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무언가.

그런데 허스트의 작품 앞에서 나는 풍요로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가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들켰다.

우리는 죽음을 일상에서 철저하게 지운다.

병원에서 죽고, 장례식장에서 처리되고, 검은 리본과 국화꽃으로 정돈된다.

길을 걷다가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도록 사회 전체가 꽤 공들여 설계되어 있다.

그 설계 안에서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죽음이란 것이 어딘가 먼 곳의 일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허스트는 그 죽음을 수조에 담아 유리 너머로 보여준다.

도망칠 구석 없이, 조명까지 환하게 켜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요.

아마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당신이 보지 않으니까요.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 앞에 섰을 때는 또 다른 감각이 왔다.

실제 인간의 두개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작품.

죽음 위에 최고의 사치를 올려놓은 이 물건은 아름다웠다.

분명히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죽음을 이렇게 꾸며도 되는 걸까.

아니, 꾸며야만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걸까.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나는 두개골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허스트는 그걸 알고 있다는 듯 빛나는 함정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 함정에 걸려들었고, 걸려든 채로 한참 서 있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나는 좀 지쳐 있었다.

보통 미술관을 나올 때의 피로와는 달랐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서 오는 포화의 피로가 아니라, 생각을 많이 해서 오는 피로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화가 조금 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느냐고. 전시 보러 왔더니 죽음 앞에 서게 하느냐고. 일상에서 잘 잊고 지내던 것을 왜 굳이 꺼내느냐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화가 조금씩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불편했다는 것은 뭔가를 느꼈다는 뜻이고, 뭔가를 느꼈다는 것은 작품이 나에게 닿았다는 뜻이다.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물었는데, 어쩌면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일상 밖으로 밀어낸 것은 허스트가 아니라 우리였으니까.

그가 한 일은 그것을 다시 눈앞으로 끌고 온 것뿐이다.

미술관이 풍요를 주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불편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불편이 오늘 내가 받은 것 중에 가장 오래 남을 것 같다.

자꾸 파리가 생각난다

소의 동그란 커다란 눈과

바닥의 빨간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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