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나귀

그리고 인생의 속도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의 나귀가 달빛 아래 메밀밭 사이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모습을 읽으며, 오늘 기흥저수지를 돌며 마신 캔커피의 쌉쌀한 향이 다시 떠오른다.

허 생원의 나귀는 급할 것이 없었다. 장터에서 장터로, 달빛이 쏟아지는 메밀밭 사이로 제 걸음을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저 자신만의 속도로. 마치 장바구니가 달린 나의 여성용 자전거처럼 말이다.

속도는 나지 않지만 편안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길가의 풀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페달을 밟는다.


아들의 수입 자전거는 허 생원의 젊은 시절을 닮았을까. 겉보기엔 화려하고 멋지지만,

한 번 고장 나면 그 대가가 만만치 않다.

젊음의 열정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값비싼 수업료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또한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니던가.


할아버지의 만능 자전거는 허 생원의 나귀와 가장 닮았다.

농산물을 가득 실고도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는 모습.

화려하지 않아도 실용적이고, 빠르지 않아도 확실하다.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지혜가 그 바퀴 하나하나에 스며있다.


친구의 가방 달린 자전거,

전기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이의 모습,

경차보다 비싼 자전거로 취미를 즐기는 이들...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간다.


「메밀꽃 필 무렴」의 달밤처럼 고요했던 기흥저수지 둘레길. 초록 속에서 마신 캔커피는 어떤 고급 원두보다 달콤했다.

자연이 내려준 여유로움이 그 맛을 더했기 때문이다.


허 생원의 나귀가 메밀꽃 향기에 취해 걸음을 멈추었듯, 우리도 때로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빨리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귀든 자전거든, 결국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들이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밤의 아름다움을, 저수지 둘레의 싱그러운 녹음을,

그리고 그 순간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각자의 자전거로, 각자의 속도로 가더라도 결국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다.

허 생원의 나귀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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