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less judge

운명을 거부해도 살아있더라

by 트루먼 초이

고지된 운명이라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endless jugde에서 탈출한 순간 살아있음을 느낀다.

살아있길 잘했다.


1. 꿈 : 신의 고지와 탈출

2월 11일 밤. 너무나도 기억이 선명한 꿈을 꿨다.

잠에 들었다가 2월 12일 새벽에 이 꿈 때문에 깼다.


신이 나타났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내일 죽는다.”


배경은 여의도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 말이 너무 선명했고 반복적이었다.

너무 반복적이어서 그 말에 잠시 세뇌당했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의 눈을 속이며 택시를 탔다.

여의도에서 신길로 이동했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

그렇게 멀리 간 것도 아니었다.


혹시 신에게 도망친 사실이 들킬까 불안해졌다.

도망친 사실이 들키면 더 큰 벌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택시를 탔다. 내리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택시 안에서도 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너는 못 도망간다. 내일 죽는다니까.


꿈속 시간은 오후 5~6시쯤.

구름이 낀 어둑한 저녁이었다.

택시는 올림픽대로를 돌아

다시 여의도 부근을 맴돌았다.


나는 기사님께 공원에 내려달라고 했다.

어둑한 공기 속 야경과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

나는 내려서 여의도공원으로 향했다.


여의도 공원 어딘가에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들킬까 계속 걱정하면서도, 계속 움직였다.


신은 냉소적이었었다.

내가 어떻게 죽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줬었다.

마치 판결문을 읽어주듯,

이미 결정된 결말을 상기시키듯.

예고라기보다 선고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이 예고한 미래가 오지 않았다.

죽는 장면이 펼쳐지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나 안 죽네?’


그 순간 깼다.


2. 해석

이 꿈은 죽음에 대한 꿈이라기보다

운명에 대한 꿈이었던 것 같다.


신은 아마 피할 수 없는 무엇의 상징이었을지 모른다.

이별일 수도 있고, 외로움일 수도 있고,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충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신은 또 다른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Endless judge.

끝없이 나를 심문하는 존재.

증거를 들이밀고,

내 잘못을 상기시키고,

판결문을 반복해서 읊는 존재.


넌 결국 또 실수할 거야.

넌 결국 또 홀로 남겨질 거야

넌 결국 또 무너질 거야.


그 목소리는 익숙하다.


내 안에서 종종 들리는 생각과 닮아 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너 자신을 보라.

만족해도 허무함을 느끼는 너 자신을 보라.

깨달음을 진짜 얻은 게 맞는지 다시 생각해 보라.


그런데 꿈에서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빠져나왔다. 택시를 탔다. 운명 말고 나를 선택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신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을 것이다.


그래, 내가 부족하니까.

그래, 벌 받아야지.

그래야만 마땅해.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잘잘못과 관계없이,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그렇게 나약한가?


빠져나옴은 비겁함이 아니라

판결의 굴레를 끊으려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했던 순간.


신이 보여준 미래가 오지 않았을 때.

죽음이 현실이 되지 않았을 때.


어? 나 안 죽네?


그건 단순한 안도가 아니었다.

예언은 반드시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첫 체험이었다.


물론 안도는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이게 잠깐의 state는 아닐까.

곧 다시 신이 나타나 죽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안도와 불안이 번갈아 머릿속을 휘젓는 그 순간,

나는 깼다. 마치 스스로 증명하듯이.

네가 살아있는 걸 느껴보라는 듯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꿈은 죽음의 예고가 아니라

내가 나를 영원한 재판에 세워두고 있었던

시간에 대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의식 속에서

이걸 확인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판결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예언은 깨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신은 전능하지 않았다.

그는 반복적으로 보여줬지만

결말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나는 살려고 움직였다.

내가 계획한 삶을 지금부터 그려나가려고

과거를 품되 현실을 바라보겠다고

내 뒤의 어두운 그림자에 갇혀 있지 않고

희미한 야경 속 가로등 불빛이라도 따라가겠다고


그날 새벽, 나는 살아있는 미래를 잠깐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Endless judge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음을 선택할 수 있다.

재판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은 전능하지 않았고,

판결은 반복되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피고가 아니었다.


그날 새벽,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깨어났다.


살아있길 잘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