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는 남는다. State가 어떻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려 한다.
내가 좀 더 나로 남기 위해서.
고1 때 담임 선생님이 윤리를 가르쳤다.
항상 말했던 단어가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영역.
만 서른이 된 지금,
그 말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규정하는 것은 회피일까?
하지만 진짜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도 있다.
나는 아무리 이성친구에게 잘해주어도
그는 서운해 할 수 있다.
99개의 노력보다 1개의 실수에
아쉬움을 토로할 수 있다.
그 1개의 아쉬움을 없애기 위해
99개의 노력을 999개로 늘려도
그 1개는 여전히 존재했던 것 같다.
어떤 날에는 999개가 500개로 깎이기도 했다.
You’re retired.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 1개를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두고,
설령 싸울지언정 나다운 선택을 했다면
관계는 더 건강했을까.
이 이야기를 꺼낼 때 가장 조심스러웠던 건
내가 회피의 개념을 헷갈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었다.
회피의 습관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회피형이라는 프레임도 위험하다.
누가 회피형인지 아닌지는
누가 정하는 걸까.
다수의 투표일까.
심리학 규정일까.
어떤 법문일까.
잘 모르겠다.
회피형의 행동.
회피형이라는 판결.
이 두 가지 모두가
관계에 흠집을 낸다고 느낀다.
인간관계에서는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서로가 좋고 싫은 정도 또한 중요하다.
옳음과 좋음은
100% 일치하지 않으니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보면
회피하고 싶을 때 눈 딱 감고 상황을 마주한다면,
상대의 회피를 알더라도
재판 대신 선처를 할 수 있다면,
화가 차지하던 감정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회피와 경계를 구분하려 한다.
나를 지키려는 회피에 대해서는,
그것이 상대를 해하지 않는다면
너무 가혹하게 심판하지 않으려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려 한다.
내가 좀 더 나로 남기 위해서.
State가 어떻든 Self는 남는다.
State를 인정하고 Self를 다듬어보자
불완전한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