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길 잘했다는 말에 공감하려면
기쁨과 슬픔은 사라진다
감정이 사라져도 난 살아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살아있길 잘했단 말을 공감할 수 있겠어?”
한 래퍼가 노래에서 던진 질문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
살아있길 잘했다—이런 생각을.
그도 그럴 것이, 감사하게도 내 삶에는
육체적 건강을 위협하는 질병도, 큰 사고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건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처음,
아주 선명하게 느낀 순간은
2015년 11월, 수능을 망친 뒤였다.
목표는 서울 문과 명문대였지만
성적은 지방 사립대도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막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처음 찾아왔다.
“아… 그래도 나는 살아있긴 하네.”
감정적 시련을 겪어도 대부분은 살아간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맞다, 우리는 살아간다.
기쁘든 슬프든 살아간다.
기쁨의 state가 끝나도 살아가고,
슬픔의 state가 지나도 살아간다.
도파민 수치는 내려오고,
세로토닌은 다시 정상 범주로 돌아오겠지.
뭐가 됐든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가더라.
우리는 어떤 상태를 마주하든 살아간다.
그 상태가 내 생명을 좌우하는 일이 아니라면
가슴이 아파도, 몸이 아파도 살아간다.
기뻐도 살아간다. 기쁨이 끝나도 살아간다.
그래서 알게 된다.
기쁨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쁨은 떠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 허무가 온다.
허무는,
기쁨을 만들어준 대상에 대한 판단까지
왜곡시키기도 한다.
나에게 기쁨을 줬던 대상도
시간이 지나면 나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나를 낳아준 엄마와도 싸울 때가 있고,
사랑을 나누던 여자친구도
자신이 세운 기준 아래에서
신뢰가 깨지면
말로 나를 벨 수 있다.
그건 분명히 불쾌하다.
이런 이별도 있었다.
“넌 나 같이 외모가 훌륭한 사람,
다시 찾기 쉽지 않을걸.”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분하지 않았다.
대신 촛불의 남은 불씨가 스르르 힘을 잃듯,
그 말과 함께 내 감정이 꺼져가는 걸 느꼈다.
왜 그랬을까.
살아있음에 대해 물어보는
저 래퍼의 가사를 듣고 생각해 보니
아마도 우리의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은 아닐까.
그 세계관은 state 중심이다.
외형(state), 순간의 매력(state),
기쁨(state) 같은 것들로
관계의 우위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state의 허무를 경험하고 공감해 왔다.
영화 소울에서 조 가드너가
그토록 원하던 재즈 팀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뒤 묻는다.
“이제 앞으로 뭘 하면 되나요?”
재즈 팀 리더는 말한다.
“이 공연을 계속하면 된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기쁨이 아니라 고민의 표정.
이게 내가 원하던 행복이 맞을까?
기쁨은 목적이 될 수 없고, 곧 지나가고,
결국 남는 것은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지난 시간 동안 몸으로 배웠다.
어떤 삶이 정답인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해졌다.
누군가 기쁜 state로 나를 설득하거나
외형적 state로 관계의 가치를 규정하려 한다면
그건 더 이상 나의 본질에 닿지 않는다.
오히려 깊이의 괴리만 드러난다.
State는 지나가지만, 존재는 남는다.
살아있길 잘했다는 말에 공감하려면
결국 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