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사이의 세계

판타지 상상소설

by 책마법


수는 오늘도 연습실에서 대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정대사 8번, 자유연기 3번, 뮤지컬 넘버는 2절까지. 발음, 표정, 동선까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쿤은 구석에서 수를 지켜보며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무대 뒤에서 형을 기다리는 시간이 쿤에게는 가장 많은 상상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형. 문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도망치고 싶은 거야?”

“아니. 상상한 대로 펼쳐지는 세계.

그 안에선 내가 쓴 이야기들이 진짜가 되는 거야.”


수는 씩 웃었다.

“그럼 거기선 내가 주인공 해도 되냐?”


그날 밤, 둘은 연습실 문에 이상한 낙서를 발견했다.

[들어올 준비가 되었으면, 문을 열어.]


장난인가 싶었지만, 수가 무심코 문을 밀자 갑자기 세상이 뒤틀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었다.


연극 무대처럼 생긴 곳. 그러나 이상하게도 객석이 숨을 쉬고 있었고, 조명은 별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형. 이건... 내가 며칠 전에 쓴 시나리오야.

이 배경, 이 대사, 이 느낌...

전부 내가 만든 세계야.”


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순간, 누군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아니, 수였다. 그런데 지금 옆에 있는 수가 아니라, 쿤이 상상한 캐릭터로 재구성된 수.

완벽한 연기, 정확한 동선, 흠잡을 데 없는 발성.


“형... 저게 나야.”

“그리고 저건 내가 만든 너야.”

“진짜 무섭게 멋지다...”

“그럼 쿤, 이번엔 내가 네 이야기 속에서 연기해도 돼?”

“좋아. 그럼 다음 장면은... ‘형이 용의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야.”


그렇게 그날 밤,

수는 쿤의 이야기 속에서 진짜 배우가 되었고

쿤은 수의 연기를 통해 진짜 작가가 되었다.


현실로 돌아온 건 몇 시간 후였다.

문은 다시 평범한 연습실 문으로 돌아와 있었고, 쿤의 노트북에는 새 원고가 저장되어 있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형이 연기해 준 세상]





감정의 색깔들


며칠 뒤, 쿤은 혼자 연습실에 남아 있었다.

수는 무용 레슨이 있어 늦는다고 했고,

쿤은 자꾸만 지워지는 글을 붙잡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이 이야긴 아니야. 이 감정이 아니야.

도대체 내 속은 무슨 색이지...?


그때였다. 연습실 벽에 걸린 거울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 안에 다른 공간이 비쳤다.

현실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거리.

쿤이 다가가 손을 대자,

거울은 액체처럼 그의 손을 삼켰고,

순식간에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쿤은 놀랐다.

사람마다 감정이 ‘색’으로 보였다.


노란색은 기쁨, 파란색은 슬픔, 빨간색은 분노.

그리고 초록색은 평온함.

무채색은... 감정이 사라진 사람.


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회색이었다. 바랜 종이처럼.


“여긴 네 마음속이야.”

낯선 소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무지갯빛 머리를 하고 있었고, 눈동자에 별이 떠 있었다.


“넌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모르고 있지?”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회색이 된 거야. 감정의 색을 모르니까. 하지만 너에겐 길잡이가 있어.”

소녀가 가리킨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수였다.

하지만 현실의 수가 아니라,

쿤이 상상 속에서 만든 수.

어떤 대사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배역도 자신만의 색으로 바꾸는 배우.


“형이... 여기에도 있어?”

“너의 세계니까. 너의 상상 속에서 너를 가장 잘 믿어준 사람, 너에게 가장 선명한 색을 가진 사람.”

그 수는 웃으며 쿤에게 말했다.


“쿤, 이 이야기는 네가 끝내야 돼.

난 너의 장면이 필요해.”


그 순간, 쿤의 손끝에서 회색이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먼저 연보라, 그다음은 초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따뜻한 주황빛.


쿤은 노트북을 펼쳤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감정이 색으로 보이는 세계에서, 상처 입은 한 소년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나는 내 감정을 처음으로 보았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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