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호주 깡촌에서 싱글맘 생존기

by 블루

28년 전 처음 호주로 건너와 학교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그때의 나는, 만나는 한국인들과의 인연 하나하나에 너무 정성을 쏟았었다. 외로운 외국 생활 중에 만나던 인연이다 보니 한국말을 쓴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그들이 특별했다. 어쩌다 교정에서 들리는 한국말을 따라 나의 눈길은 멈추었고 억지로라도 그 사람들과 눈 맞춤을 해서 기어이 통성명을 해야 직성이 풀렸었다. 그것도 인연이라 생각했고 너무도 반가웠었다. 같이 방을 쉐어하던 친구들과는 더욱 각별하게 생각했다. 나 혼자 그들에게 과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친구들에게 특별히 나에 대한 특별 권한을 주기도 했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힘든 일을 함께 하기를 원해도 나는 그 부탁마저도 오히려 감사했었다. 내일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나는 그 일들을 도왔고 때로는 떠 맡기까지 했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 당시 내게는 나를 보호하던 바운더리가 없었다.

그러나 짧으면 몇 주, 길어야 1년 남짓 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남겨지고, 떠나야 하는 시간이 여지없이 찾아왔었다. 그동안 공들여 쌓아 왔던 의리도, 정도 그들이 떠나며 흔들던 손과 함께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다. 몇 날 며칠을 혼자 아파하며 그 친구들을 혼자만 놓지 못한 채 그리워했었다. 그러다 나중에 만나게 된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던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은 나를 바꾸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 외국 생활 하면서 어떻게 맘을 줄 수가 있어? 미친 거 아냐? 당장 내일이라도 못 볼 수 있는 사람들한테"

그 선배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작은 바운더리조차도 없이 살면서 일이 생기면 아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우선으로 삼았어야 했고, 누구보다도 나를 보호했었어야 했다.


어렸던 나는 인생을 다 아는 것만 같던 그 멋진 선배의 표정을 학습하고, 닮기를 원했다. 웃음을 줄였고, 말수를 줄이고, 시크하던 선배의 눈빛을 따라 했다. 그 이전의 내 기준으로는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일만큼의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변한 내 모습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편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조금 더 마음을 닫고 사는 것을 연습했고, 차가워지는 것을 의도했다. 가면 가는 것이고, 오면 오는 것이었다. 나의 바운더리를 단단히 쌓았고, 튼튼히 했다. 인간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완벽한 인간상을 꿈 꾸웠던 나의 완벽성은, 내가 그어놓은 나의 바운더리 성벽에 물 셀틈 없는 완벽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의 특훈으로 내가 이 모든 힘듦을 견딜 수 있지는 않았을까라고 가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세상으로 나온 요즘, 나의 튼튼한 바운더리 성벽이 갈라지고 틈이 벌어지려 하는 것이 느껴져서 당황스럽다. 다시 예전 어릴 적의 내 모습이 튀어나온다. 자꾸만 바운더리를 허물고 사람들을 들이려 하는 내 모습을 느낄 때마다 겁이 난다.


비록 온라인상의 만남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글로 웃으며, 인사하며 다가온다.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나 스스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들의 아바타를 만들어 본다. 그들의 아바타는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웃고, 농담하고, 때로는 진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 한동안 보이지 않기도 한다. 더러는 사라지기도 하고, 나를 차단하기도 한다. 이유도 설명도 없다. 그리고 나 또한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찾으려 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시절인연" 이란 말을 배웠기 때문이다.


"시절인연" 요즘 세상 사람들의 인연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이다. 먼 미래를 약속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아도 된다. 달리던 버스에서 잠시 만났던 인연처럼 각자의 목적지에서 각자 내리면 그만인 관계인 것이다. 버스가 달리며 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옆 사람과 잠시 나누는 시시콜콜 잡담에 맘을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도 나의 목적지까지만 가면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잠시의 그 시절인연 안에서도 오래오래 붙잡고 싶은 인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시 오래전 그 선배의 시크한 눈빛을 떠 올리며, 내 바운더리 한쪽, 쩍 하니 금이 간 곳을 보수하기로 한다.

" 미친 거 아냐??"



작가의 이전글그래서 하이힐은 어떻게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