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기반으로 해서 마이클 커닝햄이 '세월'이라는 소설을 쓴 것을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우선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내 생각에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장애 환자였음이 틀림없고 버지니아 울프의 거의 모든 글에서 그런 면모가 느껴지며 영화 '디 아워스'역시 버지니아 울프를 우울장애 환자로 묘사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왜 우울했을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버지니아 울프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여성주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려면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빅토리아 시대는 제인 오스틴과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낭만과 환상의 대상이 되면서 동시에 굉장히 보수적이고 성적으로 억압된 동시에 타락했던 시기로 기록되기도 한다. 영국이 세계의 절반을 통치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고, 그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것은 단란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꾸린, 아름다운 여왕 빅토리아였다. 동시에 사회가 급변하고, 거리에선 연쇄살인이, 집안에서는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제국의 한 구석에서는 학살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의 중심부에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시 발표되어 전유럽의 여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결말은 남편의 "모든 것에 앞서 당신은 아내이자 엄마야."라는 말에 노라가 "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이야. 당신이 그렇듯이."라고 말하고서 집을 나가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1789년 12월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멀쩡한 여성이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본분을 부정하고 남편과 자식을 버린 채 자신의 길을 간다는 이야기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고 보수주의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으나, 그만큼 유명세를 탔고 곧 전유럽의 극장에서 이 극을 보게 된 여성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889년 Edith Ellis라는 영국 노벨티 극장에서 친구들과 '인형의 집' 초연을 본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감격했다. 우리는 토론을 하며 걷잡을 수 없이 흥분했고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여성에게는 한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새 세계가 열리는 지점이었다." 여성에게는 성욕이 없다고 의대를 나온 의사들이 주장하고(당시는 의사들이 전문직화되고 교육받아서 양성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욕망을 가지지 않은 채 집안의 천사로 남아있기를 주장하는 남성들에 맞서서 "나는 그동안 너무나 잘못된 대우를 받았어. 나는 사실 행복한 적도 없었는데. 나는 친정으로 돌아갈 거야. 내게 가장 신성한 의무는 바로 나 자신에게 충실할 의무야. 나도 당신처럼 이성을 가진 인간이야."라고 선언하는 노라는 곧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고 집안의 천사로 남아있기를 거부하면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여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한 명의 노라였다. 1931년 연설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집안의 천사를 죽여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글을 써낼 수 있으려면 이 분명한 유령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정신이나 소망 같은 것이 전혀 없고, 그저 타인의 정신이나 소망에 언제나 따르는 것을 더 선호했다." 이것은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 중 하나였고 동시대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미친 정신의학이 여성의 정신질환을 남성적이고 도구적인 방법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려 들면서 매주 화요일마다 히스테리아 증상을 가진 여성을 마치 동물을 보이듯 정신의학이 궁금한 남성들 앞에 내보이며 '히스테리아는 자궁이 움직여서 생기는 병이다. 치료법은 결혼을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던 당시의 사회에 반기를 드는 선언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분명한 정신질환 환자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질환은 자궁이 움직여서 생긴 게 아니다. (어떠한 여성의 정신질환도 그렇게 생기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신질환은 집안의 천사로 묶여있던 몸과 정신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집안의 천사로 묶여있어야 하는 사회 규범과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버지니아 울프의 글의 특징인 의식의 흐름 기법은 그러한 여성의 분열되고 와해된 자아를 나타내는 데에 일조한다.
"매번 파티를 열 때마다, 자기 자신이면서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의미로선 그것이 더욱더 진실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라는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래리사 댈러웨이의 독백은 당시의 '집안의 천사'들이 느끼던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클래리사는 젊었을 적 샐리 시튼이라는 여성과 깊은 관계에 있고 키스까지 한 퀴어로 묘사되지만,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남성과 결혼을 했고, 현재는 늙어버린 중년의 부인이 되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클래리사가 저녁에 파티를 여는 하루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체적으로 행복을 찾기 위한 어떠한 몸부림처럼 보이면서도 결국엔 실패한 시도로 묘사된다. 너무나 사회적이고 규범적인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어버린 파티에서 클래리사는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PTSD에 시달리는 한 환자가 강제로 요양소에 입원해야 한다는 선고를 듣자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대화주제로 올리는 손님들을 보며 그 손님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자살한 그 환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심지어는 즐거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것은 클래리사의 우울장애와 답답함을 나타낸다. 그녀의 답답함의 원인은 집안에 갇혀 살아야 하고, 일생이 오늘 하루처럼 혼란스러우며 주체적으로 행복을 찾으려 노렸했으나 결국 결과는 망쳐진 파티였던 그녀의 삶에 있다고 추측할 수 있고, 이러한 여성의 삶은 당시 영국 여성들의 삶을 리트머스지처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클래리사의 친구인 샐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죄수가 아닐까요? 언젠가 감방의 벽을 드륵드륵 긁어대는 남자 얘길 쓴 희곡을 읽은 일이 있지만, 이거야말로 인생의 거짓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독방의 벽을 긁고 할퀴는 것 말이에요." 샐리가 클래리사와 마찬가지로 그 답답함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클래리사와 샐리는 젊었을 적 서로를 이해하는 깊은 관계였을 것이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영화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키워드로 얽혀있는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가정에서 동일한 답답함과 외로움을 겪는 세 여성의 모습을 서로 교차시켜가며 그려내고 있다.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댈러웨이 부인'을 끝내 쓰기로 하는 버지니아 울프 역을 한 니콜 키드먼, 집안의 천사로 살아가며 남편을 위한 케이크를 만들지만 결국 망쳐버리고 가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사회적 자살을 한 줄리안 무어(줄리안 무어가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이 "가정은 편안한 포로수용소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주부들이 모두 '이름 없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음을 지적한 베티 프리단이 등장하기 바로 이전, 1950년대의 미국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클래리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소설 속 클래리사처럼 파티를 준비하지만 자신과 노라처럼 가정을 떠난 어머니에 대해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시인인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앞에서 자살을 해버리고마는 망쳐진 파티의 주인공 메릴 스트립이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을 쓴 마이클 커닝햄은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우화를 쓰는 것이 특기인데 이는 아주 짧은 단편소설인 '백조왕자'에서도 드러난다. (글의 마지막에 '백조왕자'를 옮겨놓은 글의 링크를 걸어놓을테니 마이클 커닝햄의 작품세계가 궁금한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디 아워스' 또한 (시대가 다르지만) 3세대에 걸쳐서 내려오는 억압된 가정과 사회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은 집안의 천사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며 가정을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삶의 마지막에서 자살을 해버리고, 줄리안 무어는 철저히 집안의 천사로 살아가다가 자신을 찾기 위해 노라처럼 아이와 가정을 등지고 집을 떠나오며, 클래리사인 메릴 스트립은 그런 떠난 어머니에 의해 상처를 입고 자살하는 아들--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자살한 환자에서 모티프를 따온 인물일 것이다--을 망연히 바라본다. 영화에는 대사로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메릴 스트립 역시 자신의 눈 앞에서 자살한 사랑하는 이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줄거리는 사회와 가정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무기력, 우울의 늪으로 몰아넣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원작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줄거리는 다르지만 두 작품의 정수가 되는 메시지는 똑같다. 갇힌 포로, 망쳐진 파티.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영화 '디 아워스'를 보았다면 이제 20세기 대표 페미니스트 감독인 마를렌 고리스의 '댈러웨이 부인' 영화를 볼 차례다. 이 영화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특색을 잘 살려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연출이 어설프지는 않다. 오히려 소설은 20명 가까이 되는 등장인물의 독백과 의식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줄거리 파악이 어려운데 그럴 때 '댈러웨이 부인' 영화를 본다면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를렌 고리스는 페미니즘 영화의 대모인 샹탈 에커만의 권유로 영화감독의 길에 접어들었고, 수잔 세이들먼, 아녜스 바르다, 마가레테 폰 트로타와 함께 당대 최고의 여성 영화감독이 되었다. 데뷔작인 '침묵에 관한 의문'에 대해서 '시네아스트'는 "낡은 전통과 투쟁하는 유럽 최고의 페미니스트 감독"이라고 칭한 바 있는데, 당시 유럽의 언론은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치의 유대인 말살, 헤롯왕의 영아 학살, 흑인 린치를 정당화하는 꼴"이라거나 "아무런 성과 없이 선동적이기만 한 영화", "몇 가지 재밋거리를 섞은 페미니즘에 대한 시시한 우화"라며 무수한 악평을 퍼부었다. 그러던지 말던지 이 영화는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마를렌 고리스는 기존의 가부장제 비판을 통해 상대적인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갔던 페미니즘 방식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여성들간의 다양한 차이와 욕구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지점까지 이르게 된다.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그런 면모가 적극 부각되는데, 바로 소설에서는 언뜻 언급만 하고 넘어갔던 클래리사의 퀴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를렌 고리스는 여성의 퀴어성을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으로 자주 묘사하고는 하는데 그것은 마를렌 고리스의 대표작인 '안토니아스 라인'에서도 나타난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등장인물 여성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필요 없어."라는 욕망에서 남성을 도구로 이용해 하룻밤 자고 버린 후 딸을 낳아 잘 키운다. 후에 이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반려자로 맞아들이는 것은 딸을 가르치던 여성 교사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 그리고 마를렌 고리스의 '댈러웨이 부인' 모두 여성 중심의 창작물을 보고 싶다면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요즘에는 반갑게도 한국에서도 여성의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지만 예전 같았으면 논란조차 되지 않고 '인생살이 다 그렇다'라는 폭력적 일반화 아래에 묻혔을 사건들이 지금은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진지한 논란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요즈음이 반갑다. 물론 백래쉬도 일어나고, 여성의제를 외치는 사람들 간에 갈등도 있지만, 그 또한 이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련다. 어쨌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구호를 외치고 사상을 담은 창작물을 만들었는데 텅 빈 극장, 텅 빈 광장, 텅 빈 무대인 것보다는 나으니까. 앞으로 이런 작품들이 더 많이 나오고, 여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더 나아간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백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