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파수꾼'은 윤성현 감독이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청소년 성장을 다룬 소설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자주 비교되고는 하는데,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누구든 한 개의 세계를 부숴야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라는 가장 유명한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선과 악을 정확히 나누는 당시 독일의 기독교적 규범을 깨부수고 양성구유의 모습으로 흑과 백의 경계를 흐리는 이교도의 신, 아프락사스가 상징하는 새로운 가치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반면, '호밀밭의 파수꾼'은 기득권에 대항하여 방황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어린아이들이 다같이 어떤 게임을 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단다. 몇 천 명의 애들이 있을 뿐 주위엔 아무도 없어. 나 이외에는 어른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나는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이란, 누가 잘못해서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면, 그 애를 붙잡아 주는 거지. 말하자면 애들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보지도 않고 뛰잖니? 그런 때에 나는 어디선가 재빨리 달려나와서 그애를 잡아주는 거야. 하루종일 그 일만 하는 거라구. 호밀밭에서 붙잡아주는 역할, 즉, 호밀밭의 파수꾼이지.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이 대사는 청소년의 방황과 그에 대한 어른의 역할에 대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유없는 반항'의 리뷰에서 말했듯이 청춘이란 반항을 하는 시기이고, 반항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 모른다. '이유없는 반항'에서도 차를 몰고 절벽 끝으로 달려가는 치킨게임을 하다가 결국 멈추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 아이처럼. 어른들이 하는 것은 네가 절벽 끝으로 왜 달려갔느냐고 혼내는 것이 아니라, 반항을 강하게 억제하지 않고 놔두었다가 주체하지 못하고 절벽 끝으로 달려갈 때 그것을 멈춰세우는 일이다. 그것만은 위험하다고. 그것이 아이가 진정으로 바라는 어른의 역할일 것이다.
영화 '파수꾼'은 그런 호밀밭의 파수꾼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인 홀든이 말한 절벽 위의 호밀밭은 영화에서 기차가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철로로 표현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세 아이는 철로 위에서 공을 던지며 논다. 그것이 그 아이들이 유대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철로 위에는 파수꾼이 없다. 그래서 기차가 달려와 아이들을 치고 말듯이 아이들은 겉잡을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돌로 인하여 절벽 끝으로 달려나가고, 철로 위를 달리는 운명이라는 기차는 아이들을 치고 만다. 영화의 마지막에 "누가 최고야. 누가 최고야?"라고 해맑게 아이처럼 말하며 대답을 재촉하는 이제훈은 파수꾼이 자신을 잡아주기를, 아니,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만 해도 내심 좋았고 바라봐주기를 바랐던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도 같고, 그에 대해서 "그래, 네가 최고다."라고 마치 절벽 위의 호밀밭에서 떨어져서 죽은 이제훈에게 말하는 서준영은 죽은 친구를 바라보며 스스로 그 파수꾼이 되고 싶었던 홀든과도 같다. 그리고 박정민은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로 전학을 감으로써 이제훈과 마찬가지로 절벽으로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결국 파수꾼에 등장하는 세 아이는 모두 절벽으로 내달리는, 그러면서 누군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바라는 홀든이며, 그래서 자신이 자신과 같은 절벽 끝으로 내달리는 아이를 잡아서 구해주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홀든이다. 영화의 결말에는 그런 절벽 끝으로 내달리는 철로 위의 아이들을 잡아주는 파수꾼 어른이 없었던 현실을 씁쓸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줄거리 이외의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영화는 윤성현 감독이 '영화 플롯은 어떻게 짜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교본 용으로 만든 영화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의도에 걸맞게 영화는 스토리와 플롯이 다르다. 스토리는 사건이 순서대로 일어난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고, 플롯은 그것을 창작자가 의도에 따라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순서다. 영화는 이미 이제훈이 자살하고 난 후의 시점에서 시작하는 비연대기적 발단의 구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극적 긴장의 상태가 드러난 부분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기가 용이한 방법이다.1 영화의 스토리가 '이제훈과 박정민의 갈등 -> 세 아이의 갈등 -> 이제훈의 자살 -> 아버지의 이제훈(아들)의 자살의 진상에 대한 의구심과 사건의 진상 조사'로 이어진다면, 영화의 플롯은 스토리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아버지의 아들의 자살에 대한 의구심과 사건 진상 조사에서부터 시작하며 플래시백으로 과거 세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드러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윤성현 감독의 특기인 '창작자는 알지만 관객은 모르는 정보'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적재적소에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흡입하는 마력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마찬가지로 비연대기적 발단으로 시작되지만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를 보자. 이 영화의 스토리는 '친구의 죽음 -> 전여빈이 가해자로 지목됨 -> 가해자로 몰린 전여빈이 극단적 선택을 함 -> 그리고 그 후의 사건들'로 만들어져 있다. 반면 플롯은 이미 친구는 죽은 상태에서, 전여빈이 가해자로 지목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비연대기적 발단이다. 그러나 그 후의 사건들이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면서, 연대기적 전개가 이어진다. 영화는 플래시백과 현재를 오가는데 플래시백에 주로 집중했던 '파수꾼'과는 달리 '죄 많은 소녀'는 플래시백 만큼이나 현재의 사건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플래시백이 현재에 연대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구성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내용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파수꾼'과 자주 비교된다. '파수꾼'은 절벽 끝으로 달려가 떨어지고 만 남자 청소년들의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절벽 끝으로 '떠밀려' 떨어지고 만 여자 청소년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영화의 맨 첫 장면에 수화로 등장하고, 나중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전여빈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나는 여러분이 그토록 원하던 나의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지게 죽고 싶습니다." 전여빈은 어쩌다가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되던 한국 여고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 특히 남성 교사와 남성 형사에 의해 낱낱이, 배려 없이 해부당하고 만 여자 아이들만의 예민한 감수성에 가해진 폭력과 상처, 그리고 여성 호모 소셜이 가하는 정서적 감정적 압박과 폭력에 의한 것일 테다. 특히 이 영화는 아이들이 절벽 끝으로 떠밀리고 만 이유로 퀴어 코드를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 호모 소셜, 특히 여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호모 소셜 속의 퀴어니스를 적극적으로, 실감나게 묘사하며 스토리의 장치로서 이용하고 있다. 이 또한 '여고괴담' 시리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전여빈은 이 영화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여배우는 오늘도'의 3부에 나온 그 어린 배우라고는 전혀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로 점점 내면으로 침잠되고 침몰되어 가는 억울한 희생양이자 위태로운 자기파괴적 복수자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구현해내고 있으며, 마지막에 터널 안을 걸어가는 고요하고도 처참하고 외로운 뒷모습은 분명히 그녀가 죽음을 향해 홀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그 터널이 마치 죽음이자 그녀가 견뎌내야 했던 어두운 삶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드디어 여성 청소년들의 위태로운 청춘에 대한 영화를 내었다는 의의 외에도 전여빈이라는 배우를 발굴해내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전여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목할 값어치가 있는 우수한 기량을 가진 배우다.
1) 조셉 보그스, <영화 보기와 영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