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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스포일러 있습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문학에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이 있다. 물체를 흔히 알려진 관념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각되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고괴담' 시리즈는 낮선 영화이다. 그동안 학교, 그리고 학생으로 대표되는 청춘이 의미하는 관념은 획일적이었다. 그것은 김기영 감독의 영화 '충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부분에서 선생과 학생들의 질답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청춘이란 도대체 뭐냐? 아는 사람." "젊음." "용기." "생동." "순수." "아마추어." "열병." "여러분의 말을 종합해보면 청춘이란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으로, 기성세대에게 도전하는 젊음의 용기!" "와-!(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이것은 기성세대에 맞서고 그 가치를 파괴하는 신세대의 저돌적인 돌진을 그려내기 좋아했던 김기영 감독의 작품세계에 걸맞는 대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1999년 같은 해에 개봉한 '내 마음의 풍금'에서도 나타나듯이 그 당시 전반적으로 학생과 학교를 묘사한다는 것이 흔히 어떤 관념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고괴담' 시리즈는 그 흔한 관념에 돌을 던진다. 그것은 '여고괴담' 1편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어 하는 대사로 단박에 드러난다. "음... 그러니까, 학교라는 데가 말이야, 선생님한테나 애들한테나 멍청하고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거든? 마치 처참하게 죽은 시체를 봤을 때처럼 말이야. 내 말 이해 가니?" '여고괴담' 1편이 학교와 청춘의 상징으로서 젊음, 용기, 생동, 순수, 아마추어, 열병 대신에 시체를 내세운 것에서 더 나아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라는 공간과 청춘이라는 시기를 더욱 낯설게 만든다. 그것은 생과 사의 교차를 드러내는 코미디와 오컬트의 부조화를 통해서다.


"아무도 있다 아무도 있다 그러나 없다 아닌가 있나 없는 것 같아 아니야 있어 없다고 했지 그것은 거짓 진실은 있다 있다는 거짓 거짓은 있다 있다는 진실 아무도 몰라 아무도 없어 그래서 몰라 아무도 있어 그래도 몰라 정답은 있다 아니다 없다 있다는 진실 없다는 거짓 있다는 거짓 진실은 거짓 거짓은 진실 나는야 몰라 아무도 나야 나는야 아무다 누구나 나도 나는야 누구나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박예진(극 중 역할: 효신)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이 '낯선 문학'은 계속해서 이쪽 극단과 저쪽 극단 사이 어디에도 정확히 머무르지 못하고 뚜렷한 진실 사이를 미끄러져 죽음으로 사라지는 청춘을 표상한다. 이쪽 극단에는 정상성 규범이 존재하고, 저쪽 극단에는 정상성을 어긴 자들에 대한 응징이 존재한다. 박예진은 그 사이로 미끄러지며 청춘의 정상 표상으로 존재하는 코미디의 세계가 아닌 오컬트의 세계로 떨어지고, 그것이 저 시가 왠지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박예진은 선생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여성 섹슈얼리티의 정상성을 어긴 자들에 대한 응징)과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소문(여성 섹슈얼리티의 정상성을 옹호) 사이에서도 미끄러져 이영진(극 중 역할: 시은)과의 퀴어 섹슈얼리티로 떨어지는데, 그것은 박예진의 오컬트성이 담긴 낯선 문학이 정상성의 교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듯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영화의 첫 부분에 나오듯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가는 이영진과 달리 박예진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 이유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그러나 물 밖으로 헤엄쳐 나간 이영진은 과연 정상성의 세계에 안착했는가?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영진은 자신의 퀴어니스를 인지하고 있는 박예진과 달리 자신의 퀴어니스를 부정하는 '스톤 부치(레즈비언 혐오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부치를 뜻함)'다. 박예진과 퀴어적 관계에 있던 이영진은 정상성에서 미끄러진 둘 만이 존재하는 퀴어적 공간--둘 만의 일기장, 혹은 모성적 양수와도 같은 물 속--에서는 박예진을 인정하다가 박예진이 정상성의 공간, 코미디의 공간인 공개된 교실에서 공개적인 키스를 한 순간--정상성의 양 극단 사이로 미끄러져내린 퀴어 섹슈얼리티를 드러낸 순간--"난 네가 창피해."라고 박예진에게 말하고 둘의 관계는 멀어져 간다. 이영진은 코미디의 세계로 나아가려 하고 물 밖으로 벗어나고, 그 순간 물 속의 오컬트의 세계에 남은 박예진은 죽음으로 떨어지며 코미디의 세계를 오컬트의 세계로 물들인다. 그것이 영화의 말미 부분에 드러나는 박예진의 저주 장면이며, 그 장면은 어찌 보면 학교와 청춘이라는 관념을 전복하여 실제 지각하는 대로 표현하는 방식이고, 정상성의 세계가 경험하는 낯설고 충격적인 실재다. 그 저주는 이영진이 박예진의 실재를, 퀴어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날 때에야 사라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퀴어 섹슈얼리티에 대한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타자적 텍스트일 수 있다. 정상성의 양 극단 사이를 미끄러져 죽음으로 귀착되고 마는 퀴어는 환대를 받아야 하는 소수자로서 존재하고 환대받지 못함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그 애도의 역할을 이영진에게 시키고 있으나, 퀴어 그 자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그것을 '낯섦'의 상징으로 만들면서 숭고화한다. 숭고화의 작업은 프롤로그의 모성적 양수에 가라앉는 박예진의 모습과 에필로그에서 교회의 십자가와 종소리로 애도되는 박예진의 죽음에서 트러난다. 결국 이 영화는 여성애자라는 퀴어를 정상성의 범위를 넓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벗어나는 상징으로써 숭고화하며 텍스트에서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1999년, 여성의 퀴어 섹슈얼리티가 대중문화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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