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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Jul 04. 2024

사이다를 마실 것인가 물을 마실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고시에서 손을 털고 나왔을 때, 처음부터 무기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무렵 나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로스쿨 입시부터 고시까지 독서실 책상에 갇혀 보낸 시간만 4년. 물론 나름대로 변명 거리는 많았지만 가시적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의 시선으론 흔해빠진 고시낭인일 뿐이었다. 나는 어떤 사실부터 인정하고 시작해야 했다. 경쟁에서 비교열위에 있다는.


인정까진 좋았으나 문제는 해석이 이상한 대로 튀어버린 것이다. 남들보다 두 배 열심히 뛰어도 뒤쳐진 거리를 좁히기란 쉽지 않은 법인데, 나는 그걸 나의 한계로 해석해버렸다. 그러니까, 두 배 열심히 뛰어야 된다는 쪽보다 따라잡기 쉽지 않겠다는 쪽에 중점을 두고 그걸 뒷받침하기 적합한 근거들을 어거지로 찾아 나의 처지를 합리화했다. 나중에는 멈춰서서 앞서가는 친구들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등에는 나와 같이 뒤늦게 출발한 친구들도 있었다. 점점 낮아지는 자존감은 땅굴을 파고 들어갔고 나는 거기에 나를 묻어버렸다.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강약조절이다. 체력에는 물리적 한계가 분명히 있고 개인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걸 돕기 위해 페이스 메이커도 있고 중간중간 식수 코너도 있고, 각종 장비로 몸을 보조하기도 한다. 나는 조바심에 처음부터 전력질주했다. 그리고 퍼져버렸다. 퍼져버리는 순간에도 다시 뛰어야 하는데, 중얼거리며 불안감에 떨었다.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는 다리를 붙잡고서. 나의 오만과 착오를 원망해야 하는데 애먼 다리를 원망했다. 


지금까지 내게있어 진로를 정하는 일은 사이다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물을 마실 것인가의 문제였다. 사이다를 마시면 당장의 갈증을 해소될지 몰라도 곧바로 혀끝이 텁텁해오고 더 많은 양의 물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대신 물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시간이 더 소요된다. 때론 일회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다의 도움이 유효할 때도있다. 그러나 그때의 내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려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나의 관심사 정도는 파악해야 됐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선택에 기로에 섰을 때, 나의 기준은 공부 잘하는 애의 삶과 관련이 있는가, 부모님의 싫은 소리를 피할 수 있는가였다. 내가 공부 잘하는 애의 삶을 원했던가는 후순위였다. 그렇다고 마냥 부모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부모님의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그런 방향으로 최종 결정을 내린 사람이 나였던 것 역시 확실하니까. 현실적으론 이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데, 또 '공부는?'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너는 공부하는 애'라는 아빠의 목소리 앞에 기죽어 다른 선택을 해왔다. 무너지는 동안에도 그렇게 계속 사이다를 부어 넣었다.


이제는 물을 마시고 싶다. 고름이 껴서 진물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는 피해의식을 해소하는 것을 그 시작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글을 쓴다. 상처는 이 공간에 온전히 털어내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찾은 다음 새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다시 출발선에 섰다. 이번에는 사이다가 아닌 물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내가 물을 선택했다는 것을 온정신으로 기억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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