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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Jul 09. 2024

엄마에 대한 마음

아빠는 자녀들을 때려서 피를 나게 하는 사람이었다면 엄마는 피를 말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폭력은 없었다. 다만 내가 받았던 고통은 아빠로 부터 받은 것과 비슷했다. 엄마의 방식은 투명인간으로 취급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훈육이 필요한 경우 입을 닫고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굳게 잠긴 엄마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모욕감 같은 것을 느껴야했다. 실로 피가 말렸다. 말이 좋아 훈육이지, 머리가 크고 나서는 시위로 보였다. 어디 불편해봐라, 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시위. 시위 기간은 시위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과실과 비례하지 않았다. 오직 엄마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최소 일주일, 길면 이상을 피가 말리는 느낌으로 보내야 했다.


나는 엄마의 의도에 성실히 종속되는 편이었다. 엄마의 투명인간 취급이 시작되면 눈치가 보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방에 있어도 눈치가 보였다. 화장실 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밥은 당연히 못 먹었다. 참다 참다 도저히 허기를 참을 수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먹으러 나갔다. 내가 꼴보기 싫다는 표현이었는지 엄마는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엣가시면 자리를 비켜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록 더더욱 오래 거실을 지켰다.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는 듯 거실 한 가운데서 내내 불편한 기운을 뿜어냈다. 하긴, 그게 목적이었을 텐데 자리를 비켜주길 바라는 건 사치이긴 했다.


투명인간 취급 기간이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레퍼토리가 하나 있었는데, 약봉지가 그것이다. 엄마는 온갖 약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뒀다. 두통약, 소화제, 진통제 등등. 온갖 종류의 약들이 섞여있었지만 그 다양한 약들은 마치 방금 전 복용한 것처럼 연출되어 있었다. 내가 그 모든 질병을 동시에 유발시킨 사람처럼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겠지. 라면을 먹기 위해서는 그걸 치우고 먹어야 했다. 상대방은 철저히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의 존재는 어떻게든 가엽게 각인시키려는 촌스러운 연출. 동정심 혹은 죄의식 유발이 목적이었다면 그 연출은 잘못됐다. 오히려 그걸 견뎌야하는 내가 더 아팠으니까. 지금껏 겪어왔던 숱한 사례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진저리가 난다.


내가 그런 엄마에게 꼼짝도 못했던 것은 나의 소심한 성격 탓도 한 몫했지만 거기서 꿈틀대봤자 득보는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투명인간 취급 기간만 길어진다는 것을 오랜 기간 경험으로 체득했다. 다만 맹란한 성격의 여동생은 달랐다. 하루를 못 버티고 이제 좀 그만 해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보란 듯이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리모컨도 건들이지 않았다. 화면이 광고로 전환되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위였다. 그 꼿꼿한 고집, 그러니까 부작위를 통한 훈육을 견디고 있노라면 실로 피가 말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눅들어 있는 우리를 보고 엄마는 우월감을 느꼈을까?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엄마의 부풀리기와 이간질이었다. 엄마는 때론 투명인간 취급 그 이상을 원했지만 악역이 되는 것은 꺼렸다. 그럴 때면 아빠를 이용했다. 엄마는 사실관계 편집을 참 잘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그렇게 이간질로 싸움을 부추기고는 막상 싸움이 커지면 중재자인 척, 이 시끄러운 가정의 피해자인 척 은근슬쩍 등장하며 두통을 호소하던 엄마. 나는 엄마의 위선적인 모습을 너무도 잘 안다. 차라리 대놓고 악역이 되는 아빠가 더 낫나, 저런 방식은 너무 비겁하잖아, 하고 혼란이 왔던 적도 있다.


아빠의 폭력성에 엄마 역시 피해자가 될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는 말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그 아래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을 볼 때면 의문이 든다. 겉으로 보기엔 행동과 목소리가 큰 아빠가 원인 제공자 같지만, 그 내면을 하나 하나 뜯어보면 엄마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정말로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모든 일들이 순도 퍼센트 우리 남매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에 속 비타민 음료를 마셨을 때 처럼, 어쩔 땐 큰 잘못이 되고 어쩔 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경우도 무수히 많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처벌 유무는 엄마의 기분에 달려 있었단 점에서 엄마도 아빠와 별반 다른 점이 없다.


두 번째 리트 시험을 치르기 1주일 전도 그랬다. 엄마의 투명인간 취급 대상은 우리 남매 전부였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왜 그 1주일 동안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 이유를 모른다. 엄마와 아빠가 싸웠다는 동생의 말에 따라 혹 싸움의 원인에 우리 남매가 있진 않았을까 유추할 뿐이다. 일어났을 때부터 집안에 감도는 기운이 이상했다. 엄마는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 또. 평소라면 어찌어찌 힘겹게 겨우 버텼을 텐데 그땐 정말 엄두가 나지 않았다. 1년을 통째로 리트 시험에만 쏟아부었고, 딱 1주일 뒤면 시험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번에는 또 왜그러냐고, 그만 좀 해라고 펑펑 울면서 부탁했다. 엄마는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그토록 쩔쩔맸는데도 어떠한 자극도 받지 않는 다는 듯.


물론 시험을 망친 것은 내 탓이 맞다. 다만 본인의 언짢음에 대한 응징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었으면, 그리하여 1년 준비한 시험을 치르는 나를 거뜬히 무시해도 될 일이었으면, 평생 나를 괴롭혔던 그놈의 공부 타령도 그쯤에서 멈춰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투명인간 취급을 견디는 대가로 공부 타령을 멈춰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거래에 응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둘 다를 견뎌야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리트를 망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들어온 내게 엄마가 했던 말, 


"지가 뭐 대단한 일 한다고"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또렷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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