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사모 Nov 03. 2024

다시 서울로

도둑샤워의 추억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이사와 전학을 정말 많이 다녔다. 서울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경기도 안중으로, 안중에서 다시 서울로…그리고 서울 안에서도 목회지가 바뀌어 이사를 다녔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이사기억은 전혀 나질 않지만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의 기억은 제법 선명하게 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새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는 게  늘 낯설고 두렵고 힘들었다. 아버지가 경기도 안중의 시골교회로 목회지를 옮겨야 했을 때 중학생이었던 나와 초등학생이었던 동생들은 할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기로 했다. 더 이상의 전학은 안 되겠다고 내린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새벽 5시에 어김없이 “엘리제를 위하여 “차임벨 종소리가 울리던 작은 교회 근처, 외삼촌 집에서 외사촌오빠와 언니와 함께 살았다.

청량리 역과 대왕코너를 걸어서 다닐 수 있었고, 작은 시멘트 마당에만 수도꼭지 한 개, 그리고 재래식 변소가 있었던 집이었다. 부엌엔 수도가 없었다!

겨울엔 가끔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었고 여름엔 외사촌오빠와 남동생들이 잠든 한밤중에 마당 수돗가에서 할머니가 무심코 나올지 모를 오빠 때문에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틈을 타 얼른 도둑샤워를 했다. 말이 샤워지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로 서 너번 물을 끼얹던 게 고작이었다.


엄마의 친정이며 내 외갓집은 경기도 여주에 있었다. 그 당시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있었던 외숙모는, 고등학생이었던 외사촌오빠와 나 보다 한 살 위였던  언니를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서울 변두리 전농동에 오빠와 언니가 살 집을 마련했고 , 그 집에 할머니와 나, 남동생 둘이 함께 (얹혀)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할머니는 내게 그동안 감춰두고 있었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며 주름진 손으로 쓱 눈가를 훔치셨다. 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과 말투에서 느껴지던 할머니의 속내는 지금 생각해도 뭉클하다 못해 슬프다. 부잣집 사돈 청년과 처녀가 사는 집에 손주들과 얹혀살며 그 대가로 살림을 해주고 있었던 당신의 처지가 못내 서글프셨을게다.

아버지가 시골교회 목회를 마치고 서울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을  할머니는 세상없이  환한 얼굴로 기뻐하셨다.


남편이 그 넓은 교회 마당과 테니스장까지 있었던 평택의 교회를 떠나 ㅇㅇ의집 목회를 하게 되어 서울 미아7동 산동네로 이사 왔던 날, 엄마는 우리가 살 집을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애들 절대 문 밖에 나가지 못하게 잘 지켜보라.”는 말밖에는.

문을 열고 딸들 걸음으로도 서너 발자국 내딛으면 마을버스가 오르내리던 찻길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게도 그때가 화양연화(花樣年華)였음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