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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ark Mar 04. 2021

페르소나

나로 산다는 것

외국에서 산 지도 벌써 8년째다. 누가 나한테 한국이랑 외국에서 사는데 가장 큰 차이다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바로 페르소나라고 말할 것 같다.


한국에서 살던 나는 수많은 페르소나 속에서 가끔 누가 진짜 나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어렸던 중, 고등학생 때 이런 생각을 했으니 성인이 된 뒤에서 계속 한국에 살았다면 이런 고민은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국에서 나는 아들, 친한 친구, 인사만 하는 친구, 남자 친구, 조카, 혼자 있을 때의 나, 등의 타이틀이 있었고, 거의 모든 타이틀은 대부분 상당히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었다. 친한 친구로서의 나와 아들로서의 나는 거의 뭐 다른 두 인격체였다.


하지만 내가 유럽에서 만난 친구들, 회사 동료들의 페르소나는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어느 정도의 다른 모습은 있겠지만, 한국에서 내가, 혹은 나의 친구들이 갖고 있던 페르소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얕았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들은 나로 살지 못하고 수많은 페르소나에 가려져 살아가는 걸까? 아니, 우리는 뭐가 진짜 나인지는 알까?


Photo by cottonbro from Pexels


아직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건 일단 문화적 차이에서 시작된다. 내 유년기를 예로 들자면, 아마 나의 가치관이 제일 먼저 형성된 곳은 집, 학교, 학원 등 어릴 때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곳들에서 경험한 것은, 무언가 요구되는 사항이 매우 많았다. 


학교 성적, 외적인 것, 대인 관계, 심지어는 집안 사정, 등등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엔 사실 너무 많은 요구 사항이었지만, 버겁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이 한국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마주하는 대상이 기대하는 (요구하는) 그것에 맞춰서 자연스레 나의 가면이 형성됐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집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요구됐기에, 공부 열심히 하는 척을 했고, 별로 안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과묵하고 조용하기만 한 사람이라서, 그들 앞에서는 그런 사람이 됐었다.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나서서 웃기기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말이다.


반면에 유럽은, 적어도 내가 경험하기론, 이런 요구 사항이 현저히 적다. 기본적으로 부모들이 자식들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떠한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령 내 자식이 의사가, 변호사가, 연예인이 됐으면 하는 그런 거 말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역할도 비슷하다. 일방적인, 혹은 절대적인 (내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 선생님은 절대적인 역할이었다) 상하 관계가 아닌, 같은 선상에서 지식을 함께 배워가는 협력자 같은 역할이다. 그러므로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무언가 요구되기보단 내가 나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개념이 더 큰 것이다. 또 이런 사상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보니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 건 두꺼운 가면은 그다지 필요로 되지 않는다.


사실 한국에서도 가끔씩 가면이 정말 얕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사람들이 부럽곤 했는데, 이런 부분은 아마 성격적인 부분이 크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든 생각으로, 페르소나와 성격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연구 같은 것 - 성격이 페르소나의 두께를 형성하는 것인지, 페르소나에 따라 성격이 형성되는 것인지 - 이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봤더니, 역시나 있다.


Leary MR, Allen AB. Personality and persona: personality processes in self-presentation. J Pers. 201


대충 정리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지, 혹은 자신이 평가하는 내 인상의 모습 (self presentation) 등에 신경 쓰는 '강도'에 따라서 사람들의 페르소나는 달라진다고 한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성격과 페르소나를 거의 동일시했는데, 사실 성격의 구성체 (Personality constructs)들이 페르소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므로 내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 같다.


이 논문을 위의 내가 적어본 내 생각과 연결을 시켜보면, 내가 청소년기에 겪었던 한국은 - 물론 이것도 지역마다, 가정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라 일반화의 오류가 있겠지만 - 나의 페르소나를 어느 정도 두껍게 형성하는 구성체들의 '강도'가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한국과 유럽의 두 가지 문화를 겪어본 나로서는, 물론 어찌 됐건 나는 한국 사람이기에, 편리함 (convenience)에 있어서는 한국이 훨씬 낫지만 (배달음식, 언어 같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편안한 (comfort) 온전히 ‘나’를 경험하며 살아가기에는 유럽이 개인적으로는 더 낫다고 생각한다. 과장 조금 덧붙여서 나는 내가 누군지, 위와 같은 많은 생각들을 통해 20살 후반에야 깨달은 거 같다.


한국을 더 건강한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이 간극을 없애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최대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같이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 사회에서 (외모 지상주의, 학벌주의, 등)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현 상황을 집에서부터 자각하고, 학교로, 사회로 뻗어 나아가야, 또 이러한 생각을 하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시도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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