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운데 손가락이 멀쩡했다면, 기타리스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말 그대로 아픈 손가락이다. 돌쟁이 때 낮은 신발장 위에 있는 자전거를 손으로 잡으려다가 자전거 바퀴에 손가락이 끼여 손끝이 조금 잘려 나갔다. 부모님이 말씀해 주시길 응급실을 가서 다시 붙였었는데, 결국 잘린 손가락 끝 부분은 붙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장면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사실 이야기를 들어서 상상하는 건지, 꿈에서 꾼 건지 명확하지는 않다.
겉보기에는 아무도 나의 손가락이 짧은 줄 모른다. 그냥 스스로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이 손가락을 만지는 버릇이 있기는 했다. 본격적으로 이 손가락을 원망하게 된 것은 피아노를 배우면서부터이다. 내가 어릴 때는 대부분 그렇듯이 똑같은 선생님의 멘트가 있었다.
“손모양은 동그랗게 계란 말아 쥐듯이 쳐야 한다. 손톱으로 치면 안 돼.”
여기서 문제는 1cm 안되게 잘린 손가락은 손톱이 길다. 말로 표현하면 손가락은 조금 잘려나갔지만 손톱의 살은 그대로 있어서(보기에 그리 끔찍한 모습은 아니다) 손톱으로 치면 안 된다는 말을 실행하기 너무 어려웠다. 손을 동그랗게 하고 피아노를 손톱으로 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손가락 모양 때문에 많이 혼난 기억이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이번에도 악기였는데 기타를 배워보고 싶었다. 역시 이번에도 손가락이 문제였다. 왼손으로는 기타 줄을 잡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손가락으로는 기타 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네 손가락으로만 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좋은 핑계랄까? 기타 치는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손만 멀쩡했으면 멋진 기타리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부모가 되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어느 날 아이들이 아빠의 다친 이야기가 듣고 싶단다. 남 다친 이야기가 뭐가 재미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나의 다쳤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참 많이 다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곳곳에 여러 가지 흉터가 자리 잡고 있다. 흉터를 일일이 보여주면서 이야기해 주는데 아이들은 신나 한다. 문득 우리 부모님께서 고생 많으셨다는 생각과 내 손가락이 다쳤을 때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대망의 손가락 다친 이야기를 해주니 아이들이 믿지를 않는다.
“에이 거짓말.”
“진짜야. 손가락 길이가 다르잖아.”
나는 양 가운데 손가락을 가져다가 대보이며 길이의 차이를 보여줬다.
“정말이네, 아빠 많이 아팠겠다.”
새삼 아이에게 위로를 받게 되었다. 너무 오래된 나의 상처지만 이것이 아이의 약간의 재미와 아빠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손가락의 상처는 그대로이지만 아이들에게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나의 마음의 흉터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빠 많이 아팠겠다."
라고 위로해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 되면 나의 마음의 흉터가 고통의 상처가 아닌 하나의 추억으로 아이와의 연결고리로 변화하기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