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랑의 달'
* 이 작품은 소아성애자나 아동납치범을 옹호하는 내용이 아님에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강조의 의미로 적어둔다.
한 여자아이가 혼자 놀이터에 앉아있다. 비가 내리고 있고,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아이에게 한 남자가 다가선다. 집에 가지 않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아이는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럼 우리 집에 올래? 아이는 고민 끝에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남자는 아이를 잘 돌봐준다. 끼니를 챙겨주고,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도 혼내지 않고, 늦잠까지 잘 수 있도록 자신의 침대도 내준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잘 놀고, 잘 쉰다. 그러다 뉴스를 보고 알게 된다. 자신이 아동 납치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것이 현재 성인이 된 사라사가 기억하는 사건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동 납치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그녀에게 납치 사건 같은 건 없었고, 자발적으로 따라간 휴식 같은 시간만 있다. 트라우마는커녕 마음의 상처도 없다. 오직 자신을 돌봐줬던 남자 후미에 대한 미안함뿐이다.
유랑의 달은 어린 시절 아동 납치 사건을 겪은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범인이었던 남자와 다시 마주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일본 서점대상을 수상했던 이 베스트셀러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내가 처음 알게 된 것도 OTT에 올라온 영화를 통해서였다. 익숙한 배우의 얼굴에 이끌려 선택한 영화는 묘하게 나를 붙잡았다. 그건 흔히 말하는 화면의 때깔부터 각 장면을 아름답게 찍어내는 연출력 때문이었다. 평범함을 평범함 이상으로 만들어내는 힘은 소설의 필력보다 강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다 영화의 중반, 감정이 절정에 이른다. 정확히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하던 여주인공 사라사가 반격을 가하고 집을 빠져나오는 장면이다. 얼굴에 피 칠을 한 그녀가 퇴근길 번화가를 헤매는 모습을, 경황이 없어 휘청거리는 여배우의 등을 카메라가 쫓아간다. 카메라의 시선은 서서히 그녀의 옆으로, 그리고 그녀의 정면으로 움직이며 그녀를 보고 놀라는 행인들, 바로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을 비추면서 관객을 주인공과 함께 방황하게 한다. 원테이크로 찍었을 것이 분명한 이 장면은 과거 사라사가 후미와 함께 호숫가에 놀러 갔다가 경찰에게 잡히는 장면과 교차 편집된다. 이 회상 장면은 아주 중요한데, 빨리 도망가라며 밀치는 사라사의 손을 잡고 후미가 해주는 말 때문이다. 그건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한 번쯤은 꼭 해줘야 하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자라지 못한 사라사가 처음으로 어른에게서 배우게 되는 말이다. 이 장면은 아주 극적으로 연출된다. 배우의 얼굴, 목소리, 체형, 미소까지 완벽히 활용하는 것을 보면서 감독이 누구인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촬영은 어떠한가. 호수에서 수영하는 어린 사라사를 찍는 샷, 그런 사라사를 지켜보는 후미의 웃는 얼굴을 잡는 방법, 물 위에서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는 사라사의 시선. 아름답고 인상적인 장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적절한 음악과 편집이 이 장면을 백분 활용한다. 이 회상 장면은 연인 관계에서 수동적이었던 사라사가 폭행에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그녀가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게 되는 계기, 그리고 아동 납치범이 되어버린 후미를 잊지 못하는 이유를 전부 설명해 버린다. 여기서 영화 재생을 멈췄다. 눈물이 너무 흘러서가 아니었다. 이 감독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이상일. 재일교포 감독인 그의 작품은 전작 <분노>에서 이미 본 적 있었다. 이 작품에는 <유랑의 달>의 여주인공인 히로스에 스즈가 함께 했었다. 주로 일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을 많이 했었는데, 이 <분노>의 경우 원작을 뛰어넘는 엄청난 힘을 보여줬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유랑의 달>에서 감독의 연출력은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사람을 이렇게 뒤흔들 수 있다니.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지켜보던 사람을 이렇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니. 그러다 제작진 정보에서 흥미로운 이름을 발견했다. 촬영 감독 홍경표.
홍경표 감독은 정정훈 감독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촬영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조금만 언급해 보자면 <곡성>, <버닝>, <설국열차>,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생충>. 홍경표 촬영 감독이 이 영화의 퀄리티에 큰 영향을 끼쳤을까? 그랬을 것이다. 사라사가 calico라는 카페를 찾아가거나, 그 카페를 운영하는 후미와 재회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촬영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들이다.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라사가 카페 주인의 목소리만 듣고 후미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장면. 이때 카메라는 저 멀리서 지나가는 후미를 포커스를 맞추지 않은 채 흐릿하게 처리한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메뉴판을 건네고 주문을 받는 장면에서도 제대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라사의 심정을 아주 잘 살려냈다.
하지만 촬영만으로 이 영화의 힘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이었던 중반부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후미와 동물원에 놀러 갔다가 사라사를 알아본 시민들의 신고로 붙잡힌다는 아주 시시한 내용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래서 원작의 주인공은 후미에 대해 미안함만을 갖는 반면, 영화의 주인공은 미안함에다 고마움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라사의 감정과 사연을 한 번에 엮어내는 이 장면은 오롯이 이상일 감독이 만들어냈다. 좋은 스태프와의 협업이 시너지를 냈겠지만, 감독 자신의 역량이 없었다면 이런 장면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연출적으로 현명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사라사가 후미와 재회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후반에 이끌어간다. 여기서 몇 개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언급하고 싶은 것은 후미를 잊지 못하고 쫓아다니던 사라사가 후미의 애인에게 스토커 취급을 당하는 장면이다. 이는 원작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 의식과도 닿아있다. 사람의 일이라는 건 보기에 따라 전혀 사실과 다르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 특히 남녀의 문제가 그러하지 않은가. 외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내부의 관계에서 들여다보면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사라사는 과거 자신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을 선사했던 후미를 잊지 못하고 따라다니다가 스토커 취급을 받는다. 동의 하에 자신을 집으로 데려갔던 후미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소아성애자로 낙인찍혔던 것처럼. 원작 소설을 썼던 작가는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는데 우리가 밖에서 너무 쉽게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장면은 사라사의 직장동료가 애인과 여행을 가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사라사에게 맡기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사라사의 사연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알기 힘들지만, 소설에 등장한 내용을 보면 사라사의 부모는 사이가 좋았으나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이모네 집으로 보내진 것으로 나온다. 거기서 매일 밤 사촌의 성추행을 당하던 사라사가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고, 그 때문에 후미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이다. 고로 사라사가 직장동료의 딸을 돌보게 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좀 더 상세하게 나오는데, 그 여자아이를 보며 사라사는 자신의 어머니와 양육,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풀어놓는다. 우리의 통념과는 조금 다른 시각이 있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다.
원작 소설의 작가는 원래 BL물을 쓰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세상의 시선에 어떻게 왜곡되는지, 그들에게는 나름의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다는 이야기를 <유랑의 달>에서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세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을 이해하고 납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어 사라사를 폭행했던 연인의 경우도 그가 겪었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부모 관계 등이 영향을 끼쳤다고 이해하는 식이다. 바로 이 태도 때문에 작품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라사는 자신의 연인을 이해하지만, 그를 용서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하면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의 빌미가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아마 일본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경계에서 자신의 생각을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부분에 얼마만큼 동의할 수 있느냐가 아마도 이 작품을 다 보고 난 뒤의 평가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이 작품은 소아성애자를 옹호하거나 아동납치범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 이 점이 소설 말미에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영화에서는 시각적으로 보여주다 보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소위 말하는 PC함에 몰입한 관객들에게 영화의 설정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영화의 강렬함에 취하면서도 이 작품에 좋은 점수를 주길 꺼려한다. 그렇다고 남의 아이를 집에 데려가면 안 되지, 지금 혹시 소아성애자에게 동정하는 거 아냐? 라며 반감을 갖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원작 소설에서부터 작가는 그런 오해가 생기길 바랐다. 그런 감정을 느끼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른 사정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독자 혹은 관객이 느꼈을 감정에 대해 섣부른 판단이나 편견은 아니었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BL물을 써왔던 작가에게는 성적소수자들에게 변함없이 가해지는 편견과 차별을 보면서 이 같은 생각을 계속해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이건 원작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영화의 후반은 두 인물을 비참한 결말로 몰고 가기 위한 노골적인 함정을 판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야기의 에너지도 전반부에 비해 떨어진다. 원작자가 의도했던 바는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했을까? 세상의 왜곡된 시선을 이겨내고 둘이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내놓고 싶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영화에서 확인하자) 하지만 그 설정이 너무 빤하고 노골적이어서 후반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독자들은 뒷일이 충분히 예상된다. 그러다 보니 집중도가 떨어졌던 것 같다.
참고로 영화 말미에는 시각적으로 좀 충격적일 수도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이 대목에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쓰인 챕터를 삽입함으로써 해결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계속 사라사의 시점으로 서술되던 이야기에 뜬금없이 후미의 시선이 끼어들어서 흐름이 깨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현명하게, 동시에 긴 설명 없이 한 장면으로 처리했다. (앞서 말했듯 이 부분에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다) 마치 영화 중반에 사라사가 연인의 집에서 뛰쳐나오던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원작에 비해 영화가 잘 정리한 경우다. 이 두 장면만으로도 영화를 만든 감독이 얼마나 좋은 판단력을 갖추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영화 내내 보여줬던 연출력과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보면서 그가 좋은 프로듀서와 작가를 만난다면 이다음에 엄청난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로 우리는 이 영화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후반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히로세 스즈가 이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로 거듭났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고, 후미 역의 마츠자카 토리의 매력도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강렬한 영화를 만들어낸 이상일이란 감독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만일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영화가 보고 싶어 졌다면 당장 왓챠로 로그인하길 바란다. 그럴 일도 없지만, 당연하게도 이건 광고나 협찬을 받은 글이 아니다. 순수하게 감독과 영화에 대한 애정에서 쓰는 글이다. 영화를 보고 당신도 나처럼 좋았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중반부의 그 장면-사라사가 애인의 집에서 도망치며 후미가 잡혔던 호숫가의 일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래서 그 강렬함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좀 더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졌다면, 그다음에 원작을 읽어보길 권한다. 사실 원작은 영화에 비해 평이한 편이다. 이상일 감독이 만든 작품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는 원작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낸다. <분노>도 그랬고, 이번 <유랑의 달>도 그랬다. 이 감독에게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신이 올해 놓친 영화의 목록에 <유랑의 달>이 있다면 꼭 관람하길 바란다. 머지않아 이 감독은 대박 감독으로 알려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