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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Jun 29. 2023

[서평] 이과적 지식과 문과적 감성의 랑데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 심채경

 심채경이란 사람이 알쓸인잡으로 유명해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러 유튜브 방송에서 접한 그녀는 참 조곤조곤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돌발질문이나 짓궂은 농담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받아쳤는데, 그녀의 선한 인상과 함께 참 인상적으로 기억되었다. 내가 그녀를 보고 신기해했던 것은 말을 잘하는 천문학자인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교육계가 이분법 해왔던 문과와 이과의 구분에서 이과계에 저런 달변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했다. 

 그래, 이것이 나의 어쩔 수 없는 편견에 기인한 감상이란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솜씨는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글솜씨에 비하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표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는 책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국형 천문학자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형’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붙인 것은 박사가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기란 참 힘들더라는 작가의 푸념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실제로 책의 초반은 주로 그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천문학을 공부하는 것의 어려움이라던가, 천문학을 전공한 대학원생들의 현실, 그리고 포닥(박사후연구원)으로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되는 어려운 사정들에 대해 써놓았는데, 솔직히 이 정도로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후배들에게 약간이라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남겨야 할 것도 같은데, 심채경이란 작가는 방송에서 보였던 모습 그대로 책 안에서도 진솔하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그런 작가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천문학자의 모습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별을 관측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책을 펴기도 전에 제목에서부터 그건 현실이 아니라고 털어놓는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그럼 뭘 보지? 그것에 대한 답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이 고백은 한국에서 천문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겠다는 작가의 의지이지만 방송에서 보았던 그녀가 그러하듯, 결코 하소연을 하거나 고충을 토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책은 아니다. 책을 읽어보면 그녀는 그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천문학자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많은 직업인들이 갖고 있을 어려움들이기도 하기에) 천문학자로서의 삶을 너무나도 잘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자신이 공부해 온 것들을 좋아하며,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그 모든 감정이 책 속의 문장을 타고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천문학자가 쓴 책들은 대체로 뻔하다. 그 유명한 ‘코스모스’는 1980년에 쓰였음에도 여전히 우주와 천문학을 대표하는 책으로 읽히고 있고, 다른 천문학자들이 썼다는 책은 태양계를 중심으로 한 우주 지식이나 천문학의 역사를 읊는 정도가 일반적이다. 그나마 최신판이라면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 인터스텔라를 차용한 과학 지식, 제임스웹 망원경으로부터 기대하는 발견 정도가 덧붙여질 것이다. 

그런데 심채경이란 천문학자가 쓴 책은 다르다. 그녀는 천문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과학자로서 백퍼센트라는 말을 함부로 썼다가 두고두고 후회했던 실패담을 털어놓으며, 해 지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어린 왕자를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천문학자로서 그녀가 경험해 왔거나, 천문학자의 시선으로 본 세상의 이야기들을 적은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차별점은 뭐니 뭐니 해도 문장일 것이다. 아직도 첫 챕터를 펼쳤을 때의 설렘을 잊을 수가 없는데, 대학교 시절의 경험담을 풀어놓는 그녀의 필력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마치 한국 여성 소설가의 작품 일부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별 거 아닌 내용에도 계속 읽게 만드는 힘, 그 안에 담겨있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힘을 작가의 필력이라고 하는데, 심채경 천문학자는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필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몇 페이지 읽지 않아도 이 사람의 글을 계속 읽고 싶어졌고, 문학동네에서 출판을 제안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책 안에서도 고백했듯, 그녀는 예전부터 문학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의 팟캐스트를 구독할 정도니 말 다 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녀가 이전부터 읽어왔던 문장들이 그녀의 글에도 고스란히 묻어난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 소설을, 그리고 섬세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문장이 아닌 지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천문학 덕후로 새로운 지식이나 천문학 역사를 기대하고 펼친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천문학자의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책 안에서 다뤄지는 천문학 지식들은 천문학에 무지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기초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기대하는 바가 ‘천문학’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이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책은 시중에 널려있으니 다른 책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한국 천문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여느 문학 못지않게 잘 쓰인 에세이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은 당신을 만족시킬 것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많은 출판물들이 그러하듯 뒤로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후반은 내용의 통일성 없이 엮어진 듯한 인상도 준다. 그럼에도 이 책의 묘미가 천문학 지식에서 파생되어 펼쳐지는 심채경 작가의 생각, 그것을 담아낸 문장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건 희귀하다. 이런 책은 아무나 쓸 수 없다. 그야말로 이과와 문과의 랑데부다.      


 천문학은 아주 큰 단위의 지원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왜 그 돈을 투자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대중과 그 필요성을 인식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간극을 줄이는 일이 중요한 학문이다. 그 역할을 흔히 말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해줄 거라고 기대되는데, 심채경이란 천문학자는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될 자질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만큼이나 우아하고, 그녀의 태도만큼이나 솔직하고 낙관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긍정의 에너지로 문장을 채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심채경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볼 가능성은 낮다. 삶의 단상들을 녹여낸 에세이는 그 사람의 인생을 소비하기 마련이고, 아마도 그녀는 이 책에서 그 재료를 전부 써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에서도 또 다른 책은 쓰기 힘들 거라고 밝혔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해는 된다. 허나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던 사람으로서, 심채경이란 작가의 문장에서 저 먼 중세 시대에 망원경으로 밤하늘의 별을 들여다보던 천문학자의 로망을 느꼈던 독자로서, 그녀의 또 다른 책이 나오길 고대한다. 비정규직 포닥 생활을 떠돌았던 천문학자 심채경만큼이나 작가 심채경의 삶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그런다면 그녀의 두 번째 책은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고민하지 않고 손에 집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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