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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Jun 20. 2023

[서평] 여행은 하동역에서 시작되고

'나는 잠깐 설웁다' - 허은실


하동역 - 허은실


매화가 피는 밤

하동역 역사 

막차를 기다리며

두 노인

도라지를 나눠 핀다


노파의 입술을 떠난

담배 연기

자줏빛 두루마기에 봄빛이 감긴다


또 만날랑가 

안 만날랑가


질문이 가닿기 전

기차가 짧은 경적을 울리며 들어선다

거친 손들 뜨겁게 

스쳤던가

막차가 떠나고


강물 바라보는 노파 

시선 닿는 어디쯤

물빛이 검다


'나는 잠깐 설웁다' 시집 표지


처음 여행은 하동역에서 시작됐다. 

막차를 기다리며 도라지를 나눠 피우던 두 노인,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 

그것을 자줏빛 두루마기에 감긴 봄빛이라던 시인. 

또 만날랑가 안 만날랑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두 노인이 

그들이 처음 그렇게 만났을 것처럼 별 볼일 없이 헤어지고 난 뒤, 

거친 손들은 뜨겁게 스쳤을지 모르고

홀로 남은 노파의 시선에 닿은 물빛은 검다고 하니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세상에 시는 너무 많아. 

너무 많고, 너무 길고, 결국엔 특별할 것이 없어. 

수백 권의 책 중에 책장에 남는 것이 단 몇 권이듯

수십 개의 시 중에 노트에 남는 것은 한두 개뿐.

게다가 요즘엔 시를 대신할 것도 많지. 

이미 많은 노래 가사와, 래퍼들의 랩과, SNS에 박혀버린 명언들이 핸드폰을 떠돌고 있잖니.

한동안 내게 시란 그러했다.

흔하고, 별 볼 일 없는 것. 

그러니 하동역에서 겨우 찾아낸 허은실이란 세 글자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펴본 시집이었다. 

그녀의 시집은 너무나도 아팠다. 

사타구니, 허벅지 안쪽, 수음, 생살에 비벼 끄던 간절한 말, 

흰 엉덩이, ‘응’처럼 둥근 젖가슴, 딸년 마른 대추 같은 젖꼭지, 

이 젖으로 일굽을 키웠아.

내 윗세대의 여성이 겪었거나, 

혹은 그 여성들을 관통했을지 모르는 비참한 비밀들. 

그녀들의 몸에 일어났던 은밀한 사건들. 

자줏빛 두루마기에 감긴 봄빛은 적나라한 침묵이 되었고, 

하동역의 두 노인처럼 잔잔하고 애절할 줄만 알았던 문장은 쓰라렸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시가 아니다. 

시를 흉내 낸 그것은 사실 지독히도 직설적인 말들. 

나는 시인 척 쓰인 그 글을 깨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쓰고, 비리고, 

익기도 전에 나무에게서 뺏어 먹은 과실처럼 떫었다. 

이건 내가 바라던 시가 아니야.

시인이 제멋대로 쓰고, 내 입안에 욱여넣은 감정 덩어리지.

라며, 시집을 덮고 저 멀리 치워버린다. 

그런 주제에 감상을 적겠다니 건방지구나.

나도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그것을 절반쯤 뱉어낸 뒤에도

그 덕에 시는 내 안에 남아있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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