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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Aug 04. 2023

[공연] 한 편의 뮤지컬을 봐야 한다면, 라흐헤스트

창작 뮤지컬 '라흐헤스트'

 오랜만에 아주 괜찮은 창작 뮤지컬을 관람했다. 바로 라흐헤스트. 한국에는 모더니즘을 표방했던 천재 시인이라 불리던 이가 있다. 바로 시인 이상. 그에게는 부인이 있었는데, 바로 변동림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의 예술가 중에는 김환기 화가도 있다. 그에게는 김환기 화가의 영향을 받아 후에 화가로 활동하는 김향안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이 작품은 이상과 변동림, 그리고 김환기와 김향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특이하게도 변동림과 이상의 사랑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진행되지만, 김향안과 김환기의 이야기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등장인물이 딱 4명 등장하는 이 작품은 소규모 창작 뮤지컬답게 좁은 무대에서 모든 이야기를 펼쳐내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인상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 그리고 훌륭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2시간 가까운 관람 시간 동안 푹 빠져서 몰입하였으며, 오랜만에 정말 재기 넘치는, 그러면서도 감동적인 뮤지컬을 봤다. 


 참고로 라흐헤스트는 ‘예술은 남는다’는 프랑스어로 김향안 화가의 말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만약 뮤지컬을 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이후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알아도 상관이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되지만, 창작자의 의도를 보았을 때는 모르는 상태로 보는 것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러니 보겠다고 결심한 상태라면 이후의 글은 되도록 읽지 않고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냥 읽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모처럼 괜찮은 창작 뮤지컬을 만났다


 뮤지컬을 본 사람은 알다시피,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검색만으로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이지만, 이 변동림과 김향안은 동일 인물이다. 작품은 관객이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두지만,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힌트를 곳곳에 심어두었다. 예를 들면 동일한 가방을 든다든가, 노트에 적은 내용을 둘이 읽는다던가, 두 사람 다 프랑스어 사전을 갖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이 한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두 명의 예술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 아닌가. 이 자체로 일단 변동림, 즉 김향안(김환기 화가를 만난 후 그의 아호였던 향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다)에 대한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라흐헤스트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한 명의 실존 인물을 두 명으로 나눠 놓았다는 점이다. 시간상 따지면 이상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던 변동림이 훨씬 어린 나이이고, 후에 김환기를 만나게 된 김향안은 이상의 사후부터 김향안이 화가가 되는 노년까지의 나이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는 김향안이 좀 더 주인공처럼 다뤄지는 느낌이다.) 실존 인물의 이름이 중간에 바뀌었다는 사실, 서로 다른 두 명의 예술가와 만나면서 그녀의 삶도 바뀌었을 거라는 점에서 아마도 창작자는 두 인물을 분리해서 진행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져간 것 같다. (참고로 라흐헤스트의 대본과 작사는 김한솔 님이 맡으셨다.) 


 즉, 이 뮤지컬은 가장 어린 시절의 변동림이 가장 나이가 많은 변동림이 되었을 때, 가장 나이 든 김향안이 가장 나이가 어린 김향안이 되었을 때 끝나는 구조다. 굳이 이 인생을 1부와 2부로 나누자면 1부의 마지막과 2부의 처음이 만나는 지점, 이것이 뮤지컬의 엔딩이다. 


 한 명의 인물을 두 명으로 나뉘면서 생기는 재미있는 효과가 있다. 라흐헤스트는 관람객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 시킨다. (그래서 앞서 창작자의 의도대로 최소한의 정보만 아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생기는 지점에 두 인물을 만나게 한다. 흔히 말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만나서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상황과 인물의 고민, 그리고 남들은 알 수 없는 심정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안다면 아는 대로, 모른다면 모른 대로 이들의 대화 장면은 의미가 깊다.      


 두 명의 걸출한 예술가와 함께 했던 여성,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후에는 직접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도 활약했던 실존 인물을 뮤지컬에 담아낸다고 할 때 많은 고민이 생길 것 같다. 그녀를 통해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남편들(?)의 이야기만으로도 에피소드는 넘칠 것이고, 그 당시의 시대 이야기나 김향안이 화가가 되기까지의 성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심플하게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이건 변동림과 이상, 김향안과 김환기의 사랑 이야기다. 그 안에 예술가의 고뇌라던가, 김향안의 성장에 대해서도 다루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스토리 라인이 주로 관계에 맞춰져 있다 보니 어쩐지 김향안이란 인물의 성장이나 그 시대에는 보기 힘들었던 지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의 모습은 덜 부각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랑 이야기라는 누구나 공감하기 쉬운 주요 스토리 라인에 이 네 사람, 아니, 정확히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뮤지컬에는 음악 또한 아주 훌륭한데,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음악을 통해 노래로 전해지면서, 동시에 그들의 인생을 담아내어서 훨씬 강렬하고 쉽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이지 현장에서 관람하는 동안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고, 나의 감정도 극의 전개를 따라 요동을 쳤다. 실로 오랜만에 좋은 작품, 좋은 이야기를 만났다는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이후에 적은 내용은 정말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은 관람 후에 읽어볼 것을 권한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뮤지컬의 마지막이었다. 화가 김환기와의 새로운 인연을 막 시작하려는 김향안(실은 아직 결혼 전이기 때문에 변동림이지만)이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변동림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다. 김향안은 또 다시 예술가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에 변동림이 이곳의 슬픔과 괴로움은 내가 떠안을 테니 넌 새로운 시작을 하라고 격려한다. 보통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가 만나서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미래의 나’가 조언을 하고 격려를 하게 되어있다. 실제로 라흐헤스트의 중반부에 그런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김향안이 변동림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말에서는 도리어 ‘과거의 나’가 겁을 먹은 ‘미래의 나’를 격려한다. 사별의 슬픔과 괴로움은 과거로 묻고, 미래의 너는 행복을 찾아가라고. 이 신선한 발상은 한 인물을 두 명의 등장인물로 나눠서, 한 명은 시간 순서대로 한 명은 역순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이 구조 덕에 가능하다. 정말 이 대목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신선한 발상을 해낸 창작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나’가 ‘미래의 나’를 위로할 수 있다는 설정, 그리고 그것을 아름답게 담아낸 음악. 그 덕에 김향안은 새 출발을 결심하게 되고 김환기 화가에게 가서 당신의 아호를 나의 이름으로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제야 자신의 본명을 소개한다. 변동림이라고. 

 아마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인 줄 모르는 관객들은 여기서 혼란과 놀람을 경험했을 테고, 알고 있던 관객은 알고 있음에도 짜릿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엔딩까지 멋진 이야기 구조였다.           



 너무 대본에만 초점을 맞춰 칭찬한 것 같은데, 중간에도 언급했듯 이 작품은 음악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그리고 재미있기도 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다채로워서 여러 번 관람이 지루하지 않을 작품이다. 만약 지금 당장 뮤지컬을 한 편 봐야 한다면 주저 없이 <라흐헤스트>를 추천할 것 같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몰라도 좋고, 알아도 좋다. 한 번 관람했다 해도 또 다른 배우가 또 다른 작품을 보여줄 것이다. 


 작품의 제목대로 여기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은 전부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이 지금까지 남아 <라흐헤스트>라는 뮤지컬로 재창조되었다. 당신은 그곳에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된다. 모르고 궁금한 것이 많아도 괜찮다. 아름다운 음악이, 배우들의 열연이, 강렬한 이야기가 하나씩 전달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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