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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Jul 27. 2023

[서평] 편집자가 이뤄낸 빛나는 성취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 이 소설의 초반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사회주의, 외양간, 소쿠리, 민중 같은 단어가 등장한 내용은 70년대 혹은 80년대의 작품이라 해도 믿길 정도였다. 이 거리감은 현재의 장례식 장면으로 와서야 조금 해소되었는데, 정확히는 5장쯤 넘기고 난 뒤였던 것 같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표지

 오랫동안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던 이 책은 한국 땅에서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딸은 3일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조문객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구성이다. 장례식의 시작과 끝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고 보면 된다. 


 이 간단한 소개에서 나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라고? 한국 땅에서? 그게 가능한가?라는 의문, 혹은, 그래도 괜찮은 건가?라는 불편함. 당신이 걱정하고 껄끄러워했을 것처럼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제재와 처벌, 한계를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를 끝까지 고집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딸의 시점으로 이 소설은 진행된다. 


 정지아라는 이름에서 작가의 나이가 어릴 것으로 추정되겠지만 (사실 이런 추정을 낳은 데는 책의 표지가 한몫했다) 그녀는 무려 1965년생으로 1990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작가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니까 현재의 20, 30대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먼 시대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을 줄이는 것이 딸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마냥 이해할 수는 없는 아버지라는 설정이다. 누구나 그렇듯, 자식이 바라보는 부모에게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면이 한두 가지쯤 있기 마련이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 그게 바로 가족이지 않나. 소설은 그 점에서 일단 독자들 곁으로 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딸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 때문만은 아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는 남의 어려움을 못 보고 지나치는 오지라퍼였고, 때로는 자기 집의 밥벌이를 내팽개치며 다른 사람을 챙기기에 바빴다. 딸은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 온갖 어려움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아버지를 묵묵히 지켜본다. 이 책은 주인공인 딸의 태도에 공감하면서 우리 부모의 이야기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거기에 작가의 필력이 더해져서 독자와 동떨어진 시대도 경청할 수 있도록 끌어들인다. 


 어쩐지 밝고 유쾌할 것만 같은 표지와 다르게 무겁고 낡은 이야기지만, 작가의 문장이 갖는 톤은 그렇지 않다. 초반의 혼란스러웠던 몇 페이지를 넘어가면 책은 쉽고 빠르게 진행된다. 앞서 밝혔듯 소설은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을 통해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연히 등장인물마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풀어내는데, 마치 실제 장례식장에 두서없이 손님이 찾아들 듯 인물의 등장에 정해진 순서가 없다 보니 에피소드들도 두서없이 나열되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너무 많은 인물,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 방식 때문에 혼란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심지어 그 인물들이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차 장례식장에 등장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 리듬을 타면 이 소설은 계속해서 읽게 된다.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속도감이 붙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하는데, 정지아라는 작가의 필력, 그녀가 생산해 낸 문장이 표지에 속은 것 같았던 초반의 껄끄러움을 말끔히 씻어낸다. 그리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용에도 재미있게 소설을 읽어나가도록 한다. 


 그런 흡입력 있는 문장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현재의 젊은 세대는 알기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다. 공산주의자라니 괜찮은 건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땅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거리낌 없이 (그리고 부담감 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에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한 자리에만 머물다 보면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굉장한 깨달음이다. 공산주의가 금기처럼 되어 버린 한국에서 보자면 그 숱한 선진국들의 국회에 공산주의를 내건 정당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심지어 옆나라에도 있다) 마치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만 단위의 화폐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선진국들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사실인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새롭게 보게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나도 모르게 경계를 그어버린 선을 아이들이 고무줄놀이하듯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 작품을 보면서 과감하다고도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별 거 아니라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이야기 구성에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아버지가 못마땅했던 딸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내 아버지의 인생을 다시 돌아본다는 설정이지만, 작가가 그 구성을 백 퍼센트 살리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작품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분노나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야속한 마음은 있을지언정 그 강도는 크지 않다. 어머니가 있는 집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던 아버지, 자기 집의 생계를 내팽개치고 남의 집 일을 도우러 가버리는 아버지, 경제적으로 무능해서 성인이 된 딸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던 아버지라는 설정에서 보통의 딸이라면 느꼈을 서운함이나 억울함, 소위 말하는 애증의 감정이 보이질 않는다. 주인공 딸은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듯 아버지에 대해 받아들이는 편이다. 조문객들이 찾아와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도 깜짝 놀라거나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지도 않는다. 내 아버지에 대해 수용하고 있던 딸이 아니라 애증의 감정에 치이고 있던 딸이었다면 고인의 인생을 돌아보고 그걸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의 구성이 크게 와닿았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이 깔아놓은 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내 가족을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딸이 집안에서 보던 아버지와 집 밖에서 보이던 아버지의 차이를 겪으면서,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지나치게 강했던 아버지의 인생이 이 장례식에 몇 번이고 찾아와 마음을 쓰는 조문객들을 통해 이해되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다. 실제로 장례식을 치러본 사람은 안다. 조문객으로 찾아갈 때는 3일이란 시간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상주의 입장에서는 은근히 정신없고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이럴 때 누군가 도와주고 찾아와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주변 인물들은 그렇게 행동한다. 상주인 딸을 대신해 음식을 챙기거나, 손님을 챙긴다. 그리고 한국의 장례식 문화가 그러하듯, 상주보다 더 큰 슬픔을 드러내 고인에 대한 애도를 기린다. 나는 이 등장인물들(이들 중에는 공산주의자 아버지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있고, 전혀 다른 생각으로 대립하지만 친구 관계였던 사람도 있다)이 딸에게 아버지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딸은 이미 아버지에 대해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극적인 변화가 없다. 독자와 함께 변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이 소설은 결말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버지의 유해를 어디에 모실 것인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스포를 하진 않겠지만, 나는 이 선택이 참 좋았다. 주인공의 선택이 아버지의 삶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의 설정이 아쉬웠다. 딸이 조문객들을 통해 아버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면, 그래서 미움과 분노에서 수용으로 바뀌었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더욱 뜻깊게 다가왔을 텐데. 더불어 아버지를 대신해 다문화 가정의 소녀를 돕겠다는 딸의 결심도 의미가 깊어졌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소녀의 존재와 그녀를 돕고 있었다는 것이 딸이 유일하게 모르고 있던 아버지의 비밀인데, 장례를 치른 딸이 그녀를 돕는다는 건 아버지의 인생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설정이 주인공의 변화, 성장과 함께했다면 더욱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썼을 당시 작가가 정해두었던 제목은 <이웃집 혁명전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의 편집자가 현재의 제목을 제안했고,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작가는 나중에도 제목이 맴돌아 변경을 결정했다고 한다. 만약 이 책이 원래의 제목으로 출판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책을 펼쳤을 때 허들이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공산주의와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를 견뎌내야 한다. 현재의 제목과 표지였기에 독자들이 유입되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젊은 독자 중에 책을 펼쳐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국 땅의 공산주의자라는 파격적인 설정도, 정지아라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장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했겠지. 그래서 감히 나는 이 책을 편집자가 이뤄낸 성취라고 말하고 싶다. 편집자의 적절한 개입이 아주 긍정적으로 빛을 발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와 편집자의 개입은 대체로 책의 내용을 과장하거나 부풀리는 식으로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현명한 판단이 책의 장벽을 낮췄을 뿐 아니라 독자들이 작품의 매력을 알도록 이끌었다. 비록 그들이 책을 집어 들 때는 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가 되었던 <나의 해방 일지>를 떠올렸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을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이지만 감상평과는 무관하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그런 흡입력이 있다. 작가의 기가 막힌 개인기로 끝까지 돌파한 듯한 인상은 지울 수 없으나, 그걸 알아보고 돋보일 수 있도록 만든 코치(편집자)와의 시너지가 인상적이다. 비록 적절한 질문은 던지지 못했지만, 내 부모 세대의 낯선 이야기에 발을 담그고 싶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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