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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Aug 19. 2023

아이맥스가 필요 없는 최초의 전기 영화 흥행에 성공할까

'오펜하이머' - 크리스포터 놀란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계에서는 드물게 관객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는 감독이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약간의 부침이 있다 해도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블록버스터를 만들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영화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감독으로 여겨졌다.     

 

 그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그런 대중의 기대 속에서 개봉했지만 기존의 작품과는 결이 좀 다르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볼거리를 내려놓고 인물과 서사에 초점을 맞췄다. 핵폭탄 실험 장면을 다룬 예고편은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에서 체험하는 폭발 신을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런 볼거리는 딱 한 장면에 불과하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포스터


이미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보다 먼저 핵폭탄 완성에 나섰던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다루고 있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을 한데 모아 마을을 만들고, 거기서 머리를 맞대 3년 만에 핵폭탄 완성에 성공했다는 실화는 서사 자체만으로도 극적이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은 그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각기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조율하여 성과를 내야 하는 총책임자였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기, 원자가 쪼개질 수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생긴 새로운 변화는 20세기 초 복잡한 과학사를 관통하고 있다. 등장하는 과학자의 수도 많고, 그 안에 담긴 이론과 발견들도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영화의 주인공인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자체도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의 포인트는 역사라던가 과학적 지식에 무지한 관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가느냐에 있다. 

 

 그런데 놀란 감독은 이 부분에서 의외의 태도를 취한다. 관객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여기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에 대해서도 익숙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일반적인 영화라면 하나씩 친절하게 소개해 가며 이들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줘야 할 장면에서 무심하게 지나친다. 마치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잖아,라는 듯이. 대표적인 게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사과인데, 오펜하이머는 대학원생 시절 자신의 교수를 독사과로 독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를 보면서도 주인공이 주입한 게 뭔지, 갑자기 왜 다시 저 사과를 빼앗는지 아리송해진다. 혹시 저기에 위험한 거라도 넣었던 건가, 추론을 할 수 있지만, 그 추론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영화는 휙휙 지나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지식이 없는 관객들은 무려 180분에 달하는 상영 시간 내내 버거운 사투를 해야 한다. 친절하지 않은 영화의 문법에서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데다, 시간 순서도 복잡하게 뒤섞었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영화를 온전히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최근에 <오펜하이머>와 관련한 지식을 소개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 것일 게다. 즉, 이 영화는 사전에 공부를 좀 해두지 않으면 즐기기 어려운 영화다.      


 약간 의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감독은 관객들이 배경지식을 잘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영화를 진행하면서도 여러 인물이 얽힌 서사에서는 지나치게 상세하다. 핵폭탄 실험이 성공한 이후 영화 후반에 이어지는 청문회 장면을 떠올려보자. 감독은 중간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일일이 끄집어내어 굳이 하나씩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충분히 축약과 빠른 진행이 가능함에도 말이다. 아마 이 부분에서 영화가 길다고 느끼는 관객들이 많을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은 그렇다 쳐도, 핵폭탄이 완성된 이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뇌에 빠진 오펜하이머가 현실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 감독은 일일이 보여주려 한다. 앞서서는 불친절하게 보여줬음에도 말이다. 그 때문에 처음부터 허둥댔던 관객은 후반 30분에서 영화가 참 길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이미 충분한 지식을 습득한 채로 영화 내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겪은 일들에 공감해 온 관객이라면 흥미롭게 지켜볼 것이다.      

킬리언 머피가 보여준 싱크로율은 정말 놀랍다


 놀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볼거리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어려운 과학을 다루더라도 그는 항상 블록버스터급 볼거리라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거대한 스크린을 가진 영화관에서 가장 체험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테넷>의 경우에도 영화에서 시종일관 설명하는 인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각적으로 선사하는 액션의 쾌감은 충분히 즐길 만했다. (그래서 영화의 홍보도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펜하이머>에서는 볼거리 대신 서사로 승부를 보려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차별화를 두고 싶었는지 서사의 진행으로 쾌감을 주는 일반적인 문법을 포기했다. 아마도 놀란 감독은 기존의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선보였던 방식대로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성공하는 과정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관객들은 아마 서사가 주는 충격과 감동을 충분히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놀란은 좀 더 욕심을 좀 낸 것 같다. 그는 ‘새롭다’라는 인상과, 작가주의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흔히 받곤 하는 ‘예술성’이란 평가를 이번 작품에서 얻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었어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대중 영화감독’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그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서 생각할 거리, 지적 유희를 준다는 것이 대단한 점이지만, 이번에는 그 이상을 욕심을 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 선택이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아리송하다. 좀 더 친절하고 일반적인 문법을 따라갔어도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충분히 인상적인 완성도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관객들에게 불친절했을까, 그리고 왜 후반부에서는 지나치게 상세했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앞서 언급했듯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대중과 친숙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많은 걸 틀어보려는 그의 욕심이 앞섰던 것 같고, 그 선택으로 인해 부족해진 서사의 재미는 역사적 인물들의 등장으로 메워보려 한 것 같다.      


 문제는 이 선택이 현재의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앞선 작품들에서도 관객의 공감을 사지 못하면 흥행에 실패하곤 했다. (테넷의 누적 관객수는 2백만에 불과하다.) 많은 관객들이 아이맥스로 달려가는 이유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라 이번에도 화려한 볼거리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관객들이 보이는 추이, 공부가 필요한 영화라는 점, 볼거리보다 서사와 인물의 고뇌에 치중한 영화라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의 한국 관객의 경향성에는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이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지금 서민들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다. 거리에는 가게가 빠지고 임대가 붙어있는 공실이 수두룩하다. 거기에 영화관 티켓값은 올랐다. 그러다 보니 확실하게 보장된 쾌감에만 지출하려는 사람들이 늘었다. <오펜하이머>는 과연 이런 세태 속에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까?     



 영화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이 작품에는 되짚어볼 만한 논점이 두 가지 등장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기술은 항상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성취해냄으로써 발전해 왔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발견과 발명은 차후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될지를 모른 채 일단 결과를 만들어냈다. 근현대에 들어서 과학은 자신들의 성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좀 더 예측 가능해진 것 같다. 오펜하이머가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는 순간, 자신의 결과물이 가져올 파장을 걱정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주도권은 과학자들의 손을 떠났고, 그것을 사용하는 건 과학자들의 손을 벗어났다. 하나의 기술이 완성되면 통제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어떻게 사용될지 알 수 없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 번 분기점을 지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다루는 핵폭탄 발명과 그 이후의 모습은 AI 시대를 맞이한 현재를 신중하게 돌이켜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이 길을 어떻게 건너가야 할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엄청난 성과를 냈던 오펜하이머가 맥카시즘 열풍이 불었던 미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혹시 그가 소련에 기술을 넘긴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은 공산주의자 아니냐는 맥카시즘과 함께 뒤섞여 그를 공격한다. 미국은 항상 과거의 그 시절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맥카시즘의 광풍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면서 현재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미국은 과거의 오점으로 지나쳐버린 저 시대가 몇십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볼 지점이다. 


 아마도 이 두 가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관객들에게 충분히 회자될 수 있는 논쟁거리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답게 이번에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과연 한국 관객들이 이것을 수용하려 들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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