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퇴근 후의 서재 Oct 13. 2023

[전시] 판타지와 스토리에 메시지까지 담아낸 작가

'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 - 마이 아트 뮤지엄

 취미로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갤러리마다 각자의 특색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 곳은 체험형 전시를 선호한다던지, 어느 곳은 사진 찍기 좋은 전시를 주로 한다던지, 또 어떤 곳은 유명세에 비해 작품 내실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던지 하는. 그중에 마이 아트 뮤지엄의 경우 대체로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전시를 많이 여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최근에 <문도 멘도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라는 일러스트 전시를 다녀왔음에도 또다시 일러스트 전시에 도전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포스터에 그려진 그림 스타일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내가 <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이라는 전시를 선택한 데에는 마이 아트 뮤지엄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포스터


 일리야 밀스타인이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해서는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고 성공한 화가라는 수식이 따르는 것 같다. 전시 곳곳에서도 그에 대한 설명으로 그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이 좋으면 장땡이라고 믿는 나 같은 일반 관객에게 그런 수식이 어필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보다 보니 그럼에도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그의 그림은 보기 편하고 재미있다.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미국식 일러스트에 가깝고, 그림의 퀄리티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건 몇 개의 작품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다양한 대상들이 숨어있다. 너무 복잡하지 않게 그린 그림의 경우에도 화가가 공을 들여 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점을 가장 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애거서 크리스티 리미티드(ACL)와 로렌스 킹 출판사의 커미션을 받아 그린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라는 작품이다. 실제 그녀의 별장이었던 그린웨이 하우스를 배경으로 추리의 여왕으로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그녀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녹여낸 물건들이 빼곡하게 그려진 그림은 정말 감탄이 나온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그림 곳곳에 그려진 물건을 통해 80편이 넘는 그녀의 작품을 유추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양옆에 에르퀼 포아로와 미스 마플을 인형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 참 귀여웠다.)  

이것이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다. 잘 보면 유명한 작품들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인상은 사람들의 판타지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을 보다 보면 대중들이 원하는 판타지를 잘 구현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시에는 그가 LG의 의뢰로 그린 LG의 제품이 배치된 작품들도 상당수 있는데, 마치 잘 만들어진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평온함과 따스함이 느껴지고, 적절히 사람들의 동경을 자극한다.   


LG의 의뢰로 그렸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


이런 작품에서도 그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사람들의 판타지를 잘 자극한다고 느꼈던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


현실이었다면 난장판으로 여겨졌을 이런 그림도 판타지로 잘 그려냈다.


 이런 꼼꼼함과 그림을 통해 구현해 내는 정서가 아마도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겠지만, 만약 전시에서 그런 그림들만 있었다면 나는 그리 인상적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참 놀랍게 느꼈던 것은 그의 작품들 중에 사회적 메시지나 시대의 의식을 반영한 것들이 꽤 있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시 초입에서 볼 수 있는 <예상 밖의 미술품 도둑>이다. 이 그림은 <웰링턴 공작의 초상(The Duke)>라는 2020년도의 영국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낸 것이다. 1961년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연금 수령자에게 악착같이 돈을 받아내는 영국 정부가 스페인 화가 작품에 14만 파운드를 내고 갤러리로 인수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캠튼 번튼이 그 그림을 훔친다는 내용이다. (그가 훔친 그림이 <웰링턴 공작의 초상>이고, 그 스페인 화가는 무려 프란시스코 고야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배치하여 사용할 것인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낸 사건으로 읽혔다. 최근에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일리야 밀스타인이라는 작가가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그리지 못했을 그림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낸 <예상 밖의 미술품 도둑>

 

 한편 <뮤즈의 복수>라는 그림에서는 달라진 시대 의식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의 유명 화가들의 행적을 훑어보면 항상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뮤즈로 삼아 다작을 하기도 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 여성들이 도구처럼 쓰인 것에 비판적 시선이 생기기도 했다. <뮤즈의 복수>라고 이름 붙인 그림은 그 과거의 여성들 중 한 명이 화가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만약 일리야 밀스타인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면 이런 그림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뮤즈의 복수>

 이 외에도 전시에는 많은 좋은 작품들이 있다. 그의 대다수 작품들과 달리 어두운 작품도 있으며, 한 사람의 평행 우주를 한 그림 안에 담아낸 작품,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조금 색다르게 바라본 작품도 있다. 대중이 기대하는 판타지와 스토리, 그리고 메시지 모두 잡아낸 것이 이번 일리야 밀스타인 전시가 아닌가 싶다. 전시를 보고 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진다. 단순히 그림만을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메시지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한다면 재미는 더 풍성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만족도가 무척이나 높았고, 이 글에 실린 그림들이 취향에 맞다면 꼭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서평] <총균쇠>는 어떻게 21세기에도 살아남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