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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Mar 04. 2024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 후는 과연..?

<사라진 것들> - 앤드류 포터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한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접한 독자들은 총 10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책의 매력을 알아보았고 그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그중에 박정민 배우 같은 유명인이 포함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수록된 3페이지짜리 초단편 <피부>로 책의 존재를 알게 된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애정하는 도서 목록에 항상 상위를 차지했고, 단편으로 되어있다는 점, 사람의 정서를 건드린다는 점, 그 정서가 한국인에게도 공감되는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추천했다. 


 많은 팬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앤드류 포터의 차기작을 무척이나 고대했다. 작가가 펼쳐낼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했던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2015년에 <어떤 날들>이라는 작품을 발간하는데, 결과물은 처참했다. 전작에 비해 완성도가 너무나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팬들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었다. 바로 <어떤 날들>이 장편소설이라는 점. 작가 중에는 단편에 강한 스타일과 장편에 강한 스타일이 있다. 둘 다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치는 않다. 우리가 잘 아는 세계적인 문학가들도 작품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그러니 2024년에 드디어 발간된 <사라진 것들>은 앤드류 포터의 ‘차기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관심을 모을 법하다. 아마도 팬들에게는 장편에서 느꼈던 당혹감(전작에 비해 작품이 별로라는)을 만회할, 혹은 작가를 재평가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할 것이다. 출판사인 문학동네에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류 포터의 신작’이라며 마치 <어떤 날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슬쩍 지나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저자는 지난 1월 24일 문학동네의 주최로 온라인 북토크를 열기도 했다


 <사라진 것들>은 총 1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326페이지 분량의 단편집이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초단편이 포함되어 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앤드류 포터의 새로운 단편집은 실망스럽다. 장편이었던 <어떤 날들>만큼 참혹하진 않지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성공이 가져다준 압박감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 같다. 


 <어떤 날들>의 실패의 영향이 있었는지 <사라진 것들>은 작가의 성공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많이 따라가려 했다. 예를 들면 전작의 3페이지짜리 단편 <피부>의 경우 슬픈 일을 겪게 된 한 커플의 과거를 현재 시점으로, 앞으로 우리는 이런 비참한 일을 겪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며 시제를 뒤바꾼 화법과 상반되는 과거와 현재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번 단편집에서도 그런 시제의 장난질(?)이 작품 곳곳에서 보인다. 예를 들면 <알라모의 영웅들>이나 <넝쿨식물>처럼. 또한 지난 단편집의 제목이자 대표작이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경우 작품 속에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한 것이 주효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한껏 멋을 부린 표현들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작가가 자신이 잘하는 장기를 자주 써먹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실패하거나, 어설픈 흉내에 그친다면 문제가 된다. <사라진 것들>은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마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여러 번 정독했던 독자들이라면 작가가 전작의 성공에 짓눌려 힘겹게 복제한 부분들이 읽힐 것이다.) 처참한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작가가 전작에서 사랑받았던 것을 열심히 구현하려고 애쓴다는 것이 빤히 느껴져서 안쓰럽다. 독자들은 그 이상,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자가복제를 기대했을 텐데 앤드류 포터는 그 기대를 충족하는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작가 자신이 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사라진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는데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 창작자가 억지로 짜낸 이야기. 그래서 부분적인 문장과 묘사는 빛나지만 작품 전체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개인적으로 그 점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이 모호한 결말, 모호한 감정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지금 설명하기는 어렵다’라는 식으로 소설 속 인물의 감정을 제대로 적지 못하거나 소설 속 이야기의 결말이 흐지부지되는 인상을 준다면 그건 창작자가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 짜내듯이 글을 썼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국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마무리 지었다는 뜻이다. <사라진 것들>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고, 군데군데 빛나는 문장들은 있음에도 작품들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대한 여러 서평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문창과에서 좋아할 법한 소설’이라는 글이었다. 그 말은 한국의 등단 시스템을 통과한 소설(이에 대해 빛과 그림자가 명확하지만 여기선 언급하지 않겠다)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성공에는 그런 요소도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 신작에서 앤드류 포터의 행적이 등단에 성공했으나 빛나는 차기작을 써내지 못하는 수두룩한 한국 소설가들의 모습 같았다. 주목받은 등장, 창작의 고통,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민이 덜 끝난 여물지 못한 창작자의 그림자. <사라진 것들>의 많은 작품들은 그 힘겨운 결과물들 같았다. 


 하지만 이 책에도 흥미로운 단편이 있었다는 것은 언급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히메나>가 그러했는데, 한 커플이 히메나라는 여성과 서로 다르게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앤드류 포터의 소설은 미국이라는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아주 사적인 관계를 주로 다룬다. <히메나>는 그 사적인 관계가 조금 독특하게 얽힌 경우로 <사라진 것들>에서 가장 신선하게 느껴지는 구도였다. 그리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다른 평이한 것들에 비해서는 나았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앤드류 포터의 신작은 내 추천 리스트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좀 더 가혹하게는 앞으로도 앤드류 포터의 새로운 작품에 큰 기대를 걸지 않을 것이다. 장편과 단편의 연이은 실패를 보면서 밑천이 드러난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름을 버리기엔 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신세 진 것이 너무 많다. 지금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카페에 나가 소설을 읽고 싶을 때 최우선 순위로 이 책을 집어 든다. <아술>, <폭풍>, <머킨> 같은 작품들도 좋고, 초단편인 <피부>나 대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도 몇 번이나 읽었다. 그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작가가 창조한 공기 속에 빠져든다. 한동안 그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여운을 즐긴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통해 앤드류 포터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경우라면 이 글에서 다루는 <사라진 것들>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어보길 권한다. 만약 나처럼 <사라진 것들>을 읽고 실망한 이들도 다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뒤적거렸는데, 그 안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이 아직도 뜨겁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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