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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May 21. 2024

한국 소설이 창작 뮤지컬로: 천 개의 파랑

 최근 한국 소설을 바탕으로 무대 공연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의 경우도 현재 뮤지컬로 상영 중이고, 오늘 소개할 <천 개의 파랑>은 이미 연극으로도 공개된 바가 있다. 내가 소개하려는 것은 현재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상영 중인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이다.   

   

천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은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SF소설 원작인 데다, 경주마와 기수인 안드로이드 로봇이 등장하는 내용을 무대 공연으로 올린다는 것이 상상이 잘 안 되었던 탓이다. 어설프게 만들면 SF란 장르를 훼손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너무 욕심을 내면 과도한 제작비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공연을 보고 가장 놀랐던 것은 생각보다도 스케일이 크다는 점이었다. 무빙 레일과 LED 패널, 그리고 강아지 로봇까지 이용한 연출은 예상을 깨고 화려했다. 특히 작품에서 투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주마가 인상적이었는데, 커다란 말을 골격으로 재현한 뒤 사람들이 안에 들어가서 말의 움직임을 연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기수인 안드로이드 로봇 콜리의 경우 처음에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콜리 역의 배우와 보조 출연자가 함께 조종하는 모습이 어색했던 것이다. 콜리의 형상은 조금 다른 방법을 사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은 남지만 뮤지컬에 몰입하다 보니 그런 어색함은 줄어들었다. 


 (참고로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유튜브 The Musical 채널에 올라와 있다. 궁금한 사람들은 한 번 찾아보자.)



 뮤지컬은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따라간 편이다.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경주마 투데이를 몰던 안드로이드 로봇 C-27(후에 연재에 의해 콜리라고 불리게 되는)이 폐기 처분될 위기에 처했다가 소녀 연재를 만나 복구된 뒤, 안락사 위기에 처한 투데이를 위해 마지막 경주를 준비한다는 내용이다. SF를 표방한 소설이지만 가족과 관계, 그리고 로봇의 눈을 통해 본 인간 세상에 초점을 맞췄다. 참고로 제목인 <천 개의 파랑>에 등장한 ‘천 개’는 작품에서 로봇인 콜리가 인식하는 단어의 수다. 


 원작인 소설을 따라가다 보니 뮤지컬도 어쩔 수 없이 원작과 동일한 한계점을 갖는다. 바로 이야기다. 원작 소설은 감성적인 문장으로 인물들의 어두운 부분을 어루만지고 있지만, 동시에 소녀와 가족, 주변 인물들이 연결된 성장 스토리를 담는다. SF 소설 하면 떠오르는 것들과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SF의 옷을 입은 한국 소설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나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뮤지컬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과 다른 뮤지컬의 강점은 시각화다. 앞서 언급한 화려한 무대 연출도 인상적이었지만, 소설의 주요 대사와 포인트들을 노래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감성적으로 훨씬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특히 ‘외롭지 않길 바라’라든가, 극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하는 콜리의 신은 감정적인 울림이 컸다.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의 형태로 전달한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뮤지컬이 더욱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 역할을 수행할 배우들이 중요할 텐데, 뮤지컬의 대부분을 맡은 서울예술단의 배우들은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내가 본 회차는 콜리 역에 윤태호 배우, 그리고 연재 역에 아이돌 오마이걸의 효정 배우였다. 아이돌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조금 걱정이 있었는데, 의외로 배역에 잘 녹아들었다. 사실 연재라는 캐릭터가 감정 표현이 다양하다던가, 특별히 어려운 연기를 요구하는 파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이다 보니 중요한 장면에서 대사나 노래의 전달력이 떨어지면 관객의 몰입도를 망치기 마련인데, 효정 배우는 발성이나 노래의 가사 전달력이 너무 좋아서 놀랄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문 배우처럼 뛰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 뒤에 다른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 전문 배우와의 차이가 이거구나, 하는 느낌은 받는다. 하지만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는 점, 그리고 노래와 대사 전달에서 엄청났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윤태호 배우의 경우엔 극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 주어졌는데, 아주 훌륭하게 소화한 것 같다. 달리는 말 위에서 두 팔을 벌린 장면에선 몰입도가 엄청났다. 17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감정이 마지막으로 폭발하는 그 신을 아주 잘 해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커튼콜에서 마지막으로 단독 박수를 받을 만했다.   


   

 뮤지컬 <천 개의 파랑>은 소설의 매력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 낸 것 같다. 거기에 원작의 감성 넘치는 문장을 노래로 더욱 증폭시켜 전달한다. 원작을 사랑한 사람이라면 봐도 후회하지 않을 작품 같다. (이쯤에서 의심하는 사람을 위해 남기자면 이 글은 광고나 의뢰를 받아 쓰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작 소설보다 울림이 컸고, 여운이 좀 오래 남았다. 스토리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 장벽을 이미 넘어선 원작의 팬이라면 봐서 후회하지 않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뮤지컬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무대에 오른다. 5월 12일부터 시작된 작품은 이미 절반을 넘어섰으며, 오는 26일 일요일에 막을 내린다. 지금이라도 알게 된 팬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남는 표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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