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전
내가 느끼는 외로움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20대 때, 나를 위로해 주던 그림이 몇 장 있다. 그중 하나는 어두운 칠흑의 밤, 외롭게 빛나는 한 가게만 불이 켜져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 안에는 몇 사람이 등장한다. 일행인 이들도 있고, 혼자인 사람도 있으며, 그들을 상대하는 종업원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림은 그 모두를 고립시킨다. 시선을 마주 보기도 하고, 바로 곁에 있기도 하지만, 그림을 쳐다보는 순간 누구나 이해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외롭다는 것을.
그 그림은 한국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Nighthawks>다.
미국 화가들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는 예외였다. 그는 어쩐지 이유도 모르고 부유하던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전시를 설마 한국에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 전: 길 위에서’ 전시를 보고 왔다.
가급적 화가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차피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심도 있게 지식을 덧대어 가며 작품을 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작품에 대한 해석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상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보는 순간 좋다고 느껴야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전해져야 한다. 뒤늦게 설명이나 해설을 통해 알게 되면 그 작품은 절반쯤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번 전시에 대한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을 오갔던 수많은 관람객 중 한 사람의 아주 주관적이고 때로는 터무니없으며, 제멋대로인 감상이 될 것이다.
호퍼의 연대기를 따라 시립 미술관의 2층, 3층, 그리고 1층 순서로 구성된 전시는 작가의 인생을 타고 변화한 호퍼의 그림 역사를 따라간다. 그림들을 보면서 가장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은 작가의 시선이었다. 그의 집에서건, 프랑스 파리에서건, 그가 그린 그림들은 아주 독특한 광경을 담고 있다. 다리 밑, 오르던 계단 끝, 인적이 없는 공원,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 만약 사진이었다면 왜 이런 걸 찍었느냐고 누군가 물었겠지만, 셔터 한 번이 아닌 그곳에 멈춰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 장면들을 붙잡고 작품을 완성했다.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파리의 풍경이며,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않을 것 같은 다리 밑 같은 것에 관심을 갖다니. 하지만 오랜 시간 외로움을 품고 여행을 떠나봤던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세상에 섞여 들고 싶지만,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는 외로움이란 병은 바로 그런 장면, 그런 순간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계단을 오르다 발걸음을 멈추고 싶었던 것은, 파리란 대도시를 거닐다 아무도 없는 다리 밑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외로웠기 때문이다. 호퍼처럼 외로움이 머물다 간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이해한다. 그의 그림이 갖는 의미를. 나도 20대 때 여행을 떠나면 그런 장소, 그런 시선에 이상하게 끌렸었다. 당시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느꼈고, 그래서 호퍼의 그림을 지지했던 거겠지. 반면 그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호퍼의 그림들은 그냥 계단일 것이고, 그냥 정원일 것이고, 파리의 한낱 풍경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의 시선을 이해하느냐 아니냐이다. 그것이 당신의 평가를 180도로 뒤집을 수 있다.
(참고로 이번 전시는 1층을 제외하고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그래서 자세한 사진은 글에 싣지 못한다.)
호퍼의 시선은 항상 공간 안의 관찰자로서 존재한다. 그건 그가 세상의 일부로 섞여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은 웬만해선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구석, 혹은 뒤쪽에서 조용히 대상을 관찰하다가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남긴다. 그는 소심하지만 세상에 호기심은 풍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거나, 한참 재봉틀을 돌리다 창밖을 무심히 쳐다보는 장면을 캐치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이지만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블랙웰섬>의 그림에선 그가 어디서 이 장면을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아챌 수 있다. 작가는 일부러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드러냈다. 그가 목격했을 밤의 아름다움, 주변의 고요함, 그날의 공기가 다 느껴지는 듯하다. 이 그림은 신기하게도 가까이에서 볼 때보다 한 걸음 물러설 때가 정취가 더 잘 느껴진다.
<황혼의 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그림 하단의 건물이지만, 나는 그 뒤에 바람처럼 펼쳐진 나무들의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멀리 보이는 노을 진 하늘과 함께 거대한 숲이 바다를 이룬 것 같았다.
<밤의 창문>은 빛과 그림자의 명암을 선명히 드러낸 것이 포인트다. 그 절묘한 색감의 대비가 도시의 외로움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추측하게 한다. 누가, 저렇게 훔쳐볼 뒷모습을 그려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와 비슷한 것은 <도시의 지붕들>에서도 느낄 수 있다. 도시에서 바라본 낮은 고도의 태양빛이 도시를 어찌 비추는지를 잘 포착했는데, 호퍼는 외로움의 풍경이 어떤 빛에 걸렸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조각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그림들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빛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습작은 아쉽게도 호퍼의 대표작이 오지 않았지만, 이 그림을 위해 작가가 무려 19개의 드로잉을 시도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실존하는 장소가 아닌 여러 이미지를 합쳐냈다는 것은 호퍼가 관찰자로서 기록한 인상들이 풍성했다는 뜻이고, 거기서 자신이 찾는 감정의 라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일 게다.
그의 작품에는 이렇게 일부 풍경들이 합쳐지거나 상상에 의해 덧대어진 것이 많은데, 이는 수동적인 관찰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창작자가 되었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후반기의 그림들을 보면서 더더욱 느낀 것인데, 공들여 그린 명화는 몇 걸음 떨어져서 봐도 색감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경우 똑같은 구도, 똑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이어도 퀄리티가 제각각이라고 느껴졌지만 호퍼는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뉴잉글랜드에서 그린 해안가의 그림들 중에는 두터운 물감을 덧대 그린 풍경도 좋았지만, 종이에 얇은 수채로 완성해 간 해안경비대나 암석, 석회암 채석장 같은 그림들도 마음에 들었다.
비록 <사우스트루로> 그림에서 경사면에 각도 그대로 기울어지게 그린 집은 의아했지만, 어쨌건 그 지역을 비추는 빛의 각도는 참 좋았다.
그의 그림들이 영상물에 큰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에칭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들에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호퍼의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나체 여인의 초상은 그녀의 손에 담배가 들렸다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역시나 상상도인 이 그림은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부인을 묘사한다. 하이힐과 담배, 어두운 방의 햇빛 속에서 그 빛이 쏟아지는 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 굳이 뒷자리로 옮겨가 그림을 그리는 자기 부인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일지 상상해 봤다. 구도가 참 인상적이다. 이건 호퍼의 그림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유명세를 알린 호퍼의 그림은 대부분 오지 않았다. 피카소 전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피카소의 습작과 판화만 늘여놓았던 과거의 전시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퍼의 작품은 충분한 수가 들어왔으며, 아직 6월도 되지 않았지만, 올해 본 전시의 베스트로 과감히 꼽고 싶다. 그 이유는 호퍼의 대표작이 아니어도 그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림들이 대다수 있는 데다, 호퍼가 어떤 작가이고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가는 사람들은 꼭 그림의 구도와 그 장소에서 작가가 포착했던 시선에 주목하길 바란다. 그가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면, 아마도 이번 전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또 한 번 유명세의 작품 순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