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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May 27. 2023

[전시] 외로움의 빈자리를 찾아내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전

 내가 느끼는 외로움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20대 때나를 위로해 주던 그림이 몇 장 있다그중 하나는 어두운 칠흑의 밤외롭게 빛나는 한 가게만 불이 켜져 있는 그림이었다그 그림 안에는 몇 사람이 등장한다일행인 이들도 있고혼자인 사람도 있으며그들을 상대하는 종업원도 있다하지만 이상하게 그림은 그 모두를 고립시킨다시선을 마주 보기도 하고바로 곁에 있기도 하지만그림을 쳐다보는 순간 누구나 이해한다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외롭다는 것을

 그 그림은 한국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Nighthawks>.

 미국 화가들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는 예외였다그는 어쩐지 이유도 모르고 부유하던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사람 같았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 출처 위키피디아

  

 그의 전시를 설마 한국에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에드워드 호퍼 전길 위에서’ 전시를 보고 왔다

 가급적 화가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어차피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심도 있게 지식을 덧대어 가며 작품을 보는 사람도 아니다그리고 적어도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작품에 대한 해석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상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보는 순간 좋다고 느껴야 한다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전해져야 한다뒤늦게 설명이나 해설을 통해 알게 되면 그 작품은 절반쯤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로 이번 전시에 대한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을 오갔던 수많은 관람객 중 한 사람의 아주 주관적이고 때로는 터무니없으며제멋대로인 감상이 될 것이다 


나는 서울 시립 미술관이란 공간을 좋아한다

         

 호퍼의 연대기를 따라 시립 미술관의 2, 3그리고 1층 순서로 구성된 전시는 작가의 인생을 타고 변화한 호퍼의 그림 역사를 따라간다그림들을 보면서 가장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은 작가의 시선이었다그의 집에서건프랑스 파리에서건그가 그린 그림들은 아주 독특한 광경을 담고 있다다리 밑오르던 계단 끝인적이 없는 공원터널로 들어가는 입구만약 사진이었다면 왜 이런 걸 찍었느냐고 누군가 물었겠지만셔터 한 번이 아닌 그곳에 멈춰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 장면들을 붙잡고 작품을 완성했다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인적을 찾을 수 없는 파리의 풍경이며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않을 것 같은 다리 밑 같은 것에 관심을 갖다니하지만 오랜 시간 외로움을 품고 여행을 떠나봤던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세상에 섞여 들고 싶지만세상에 섞여들지 못하는 외로움이란 병은 바로 그런 장면그런 순간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계단을 오르다 발걸음을 멈추고 싶었던 것은파리란 대도시를 거닐다 아무도 없는 다리 밑에 관심을 가진 것은그가 외로웠기 때문이다호퍼처럼 외로움이 머물다 간 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이해한다그의 그림이 갖는 의미를나도 20대 때 여행을 떠나면 그런 장소그런 시선에 이상하게 끌렸었다당시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아마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느꼈고그래서 호퍼의 그림을 지지했던 거겠지반면 그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호퍼의 그림들은 그냥 계단일 것이고그냥 정원일 것이고파리의 한낱 풍경일 것이다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의 시선을 이해하느냐 아니냐이다그것이 당신의 평가를 180도로 뒤집을 수 있다    



(참고로 이번 전시는 1층을 제외하고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그래서 자세한 사진은 글에 싣지 못한다.)

 


 호퍼의 시선은 항상 공간 안의 관찰자로서 존재한다그건 그가 세상의 일부로 섞여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그리고 그 공간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그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그의 그림은 웬만해선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구석혹은 뒤쪽에서 조용히 대상을 관찰하다가 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남긴다그는 소심하지만 세상에 호기심은 풍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거나한참 재봉틀을 돌리다 창밖을 무심히 쳐다보는 장면을 캐치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이지만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블랙웰섬>의 그림에선 그가 어디서 이 장면을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아챌 수 있다작가는 일부러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드러냈다그가 목격했을 밤의 아름다움주변의 고요함그날의 공기가 다 느껴지는 듯하다이 그림은 신기하게도 가까이에서 볼 때보다 한 걸음 물러설 때가 정취가 더 잘 느껴진다     



 <황혼의 집>에서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그림 하단의 건물이지만나는 그 뒤에 바람처럼 펼쳐진 나무들의 표현도 인상적이었다멀리 보이는 노을 진 하늘과 함께 거대한 숲이 바다를 이룬 것 같았다     



 <밤의 창문>은 빛과 그림자의 명암을 선명히 드러낸 것이 포인트다그 절묘한 색감의 대비가 도시의 외로움이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추측하게 한다누가저렇게 훔쳐볼 뒷모습을 그려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와 비슷한 것은 <도시의 지붕들>에서도 느낄 수 있다도시에서 바라본 낮은 고도의 태양빛이 도시를 어찌 비추는지를 잘 포착했는데호퍼는 외로움의 풍경이 어떤 빛에 걸렸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조각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그의 그림들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빛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습작은 아쉽게도 호퍼의 대표작이 오지 않았지만이 그림을 위해 작가가 무려 19개의 드로잉을 시도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실존하는 장소가 아닌 여러 이미지를 합쳐냈다는 것은 호퍼가 관찰자로서 기록한 인상들이 풍성했다는 뜻이고거기서 자신이 찾는 감정의 라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일 게다

 그의 작품에는 이렇게 일부 풍경들이 합쳐지거나 상상에 의해 덧대어진 것이 많은데이는 수동적인 관찰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창작자가 되었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후반기의 그림들을 보면서 더더욱 느낀 것인데공들여 그린 명화는 몇 걸음 떨어져서 봐도 색감의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앙드레 브라질리에의 경우 똑같은 구도똑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이어도 퀄리티가 제각각이라고 느껴졌지만 호퍼는 그런 게 없었다그래서 이번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뉴잉글랜드에서 그린 해안가의 그림들 중에는 두터운 물감을 덧대 그린 풍경도 좋았지만종이에 얇은 수채로 완성해 간 해안경비대나 암석석회암 채석장 같은 그림들도 마음에 들었다

비록 <사우스트루로그림에서 경사면에 각도 그대로 기울어지게 그린 집은 의아했지만어쨌건 그 지역을 비추는 빛의 각도는 참 좋았다



 그의 그림들이 영상물에 큰 영향을 주고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특히나 에칭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들에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1층에서 촬영이 허가된 호퍼의 그림들. 참 역동성을 잘 드러냈다.

 

 호퍼의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나체 여인의 초상은 그녀의 손에 담배가 들렸다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역시나 상상도인 이 그림은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부인을 묘사한다하이힐과 담배어두운 방의 햇빛 속에서 그 빛이 쏟아지는 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그림을 보면서굳이 뒷자리로 옮겨가 그림을 그리는 자기 부인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일지 상상해 봤다구도가 참 인상적이다이건 호퍼의 그림에서 한결같이 등장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유명세를 알린 호퍼의 그림은 대부분 오지 않았다피카소 전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피카소의 습작과 판화만 늘여놓았던 과거의 전시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하지만 호퍼의 작품은 충분한 수가 들어왔으며아직 6월도 되지 않았지만올해 본 전시의 베스트로 과감히 꼽고 싶다그 이유는 호퍼의 대표작이 아니어도 그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림들이 대다수 있는 데다, 호퍼가 어떤 작가이고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 전시를 가는 사람들은 꼭 그림의 구도와 그 장소에서 작가가 포착했던 시선에 주목하길 바란다그가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면아마도 이번 전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또 한 번 유명세의 작품 순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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